햇빛샤워/ 양근애

관계없는 관계

– <햇빛샤워>

 

양근애(연극평론가)

 

작/연출 : 장우재

제작 : 남산예술센터, 극단 이와삼

공연일시 : 2015/07/09~26

공연장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관극일시 : 2015/07/21 pm. 8:00

 

 

연기하는 삶: 광자와 아영

 

백화점 의류매장 직원인 ‘광자’는 자기의 인생이 이름 때문에 꼬였다고 생각하면서 개명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학교 다닐 때 광자라는 이름을 두고 놀리는 친구를 면도칼로 긋고 전과자 꼬리표를 달았기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녀는 전직 형사인 브로커에게 모자란 선금을 몸으로 때우면서 개명을 의뢰한다. 그녀의 부모는 술과 담배 그리고 마뜩찮은 이름을 남기고 떠났다. 고아인 광자의 이름에 쓰인 빛 광(光)은 종종 미칠 광(狂)으로 오인 받는다. 화투를 치다가 지은 이름이냐는 놀림도 받는다. 그런 광자가 새로 얻고 싶은 이름은 ‘아영’이다. 그녀는 이제 ‘아름다운 꽃봉오리’가 되고 싶어 한다. 매니저가 되기 위해 ‘과장님’과도 자는 광자는 아영이야말로 매니저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광자가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까닭은 반지하에 사는 캄캄하고 구질구질한 인생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밝고 명랑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게 날이 서 있는 광자는, 비타민 D가 부족해 골연화증을 앓고 있는 광자는, 과장님과 자면서도 혹시 몰라 동영상으로 그 장면을 남겨 놓는 광자는, 물건을 빼돌려 돈을 벌기 위해 물류 직원의 순정을 이용하는 광자는, 이 어둠 속을 벗어나 밝은 세상으로 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게 뭐 어떠냐고 묻는 것 같다. 돈 없고 빽 없는 광자는 친절을 연기하고 사랑을 연기하고 필요하다면 피해자를, 가해자를 연기하면서 산다. 그녀는 남들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더 잘 연기하기 위해 아영이라는 이름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국 그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 광자는 끝내 죽음을 자처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이광자다, 그래 내가 이광자다.” 죽음 앞에서야 광자는 알게 된다. 이름을 바꾸어도 자신과 인생을 바꿀 수는 없었음을.

광자와 아영의 간극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이 사회의 광자들은 어떻게 해야 아영이 될 수 있는가. 광자의 삶에는 옮고 그름도 선과 악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광자가 아영이 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광자는 팔 수 있는 것을 다 팔아 돈을 구했다. 광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관계라도 맺을 수 있었다. 그것은 옳지 않고 나쁜 일이라고 쉽게 그녀를 단죄할 수 있는가. 말해보자. 광자는 정말 “썅년”이고 “또라이”인가.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대부분 아영임에 분명한 그들이 광자가 얽어놓은 관계들을 지켜보고 따져본다. 그러나 광자는 오연하다. 그녀의 오연함 앞에서 가슴이 먹먹하고 말문이 막힌다.

 

관계없는 관계: 광자와 동교

 

그런 광자에게 주인집 양아들인 ‘동교’는 세상 물정 모르고 연탄 기부나 하는, ‘삽질하는’ 어린 아이로 보일 뿐이다. 광자는 동교에게 가난은 본인이 아니라 관계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고, 누군가 착한 일을 하면 그런 착한 일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옆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냐고 동교를 다그친다. 그래도 묵묵하게 자신이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런다고 말하는 동교는, 어쩌면 장우재 작가의 다른 ‘동교’들처럼 ‘이 세상에 없는 사람’ 같다.

동교와 광자는 다른 종류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또 동교의 말처럼 아무 관계가 없는 관계이지만 그래서 가장 깊게 연루된 관계가 아니었을까. 고아라는 공통점 외에는 닮은 점이 없지만, 마치 거울 앞에서 동교가 왼손을 들면 광자가 오른손을 드는 식으로, 비타민 D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어느 날 광자는 동교가 내미는 고등어를 거부하고,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서 광자의 방에 숨어들게 된 어느 날 동교는 광자가 주는 술을 마시고, 드디어 광자가 매니저로 승진하던 어느 날 동교는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추락한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광자와 셈이 흐리고 이재에 어두워 자기가 번 연탄을 동네 할머니들에게 나눠주는 동교는 햇빛처럼 서로를 비춘다. 광자를 통해서 동교를, 동교를 통해 광자를 보지 않았다면 이들이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층 난간 위에 서서 이미 죽어버려서 광자에 대한 인터뷰를 못했다고 동교가 말하는 장면은 ‘아무 관계없는 관계’를 가장 잘 보여준다. 광자는 어두운 지하에서 위를 쳐다보고 동교는 아득한 위에서 아래 세상을 느낀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햇빛샤워를 하는 광자의 얼굴이 겹쳐지는 장면이다.

누가 뭐래도 뻔뻔하고 당찼던 광자는 동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존재의 파열을 감지한다. 윗선에게 과장과 물류를 고발한 대가로 매니저에 오르고도 홀가분한 표정을 짓던 광자였다. 어머니의 살 냄새를 맡고 싶다며 브래지어를 달라고 하던 동교에게 선뜻 자기가 입고 있던 브래지어를 벗어주었던 광자는 그로 인한 오해가, 관계없는 관계의 호의가 가져온 비참한 결과를 평소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과 관계없는 죽음이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동교의 무구한 선의를 오해한 양부모에게 칼을 들이밀어 상해를 입히고 그 칼에 찔려 죽는다.

햇빛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지만, 정작 햇빛이 필요한 사람은 햇빛을 볼 겨를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동교와 광자는 서로에게 햇빛 같은 존재였을까. 서로를 몰랐더라면 그들은 덜 불행했을까. 끝끝내 삶을 잘 연기하며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의 죽음 앞에서 <햇빛샤워>는 한 줌 햇빛의 따스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씽크홀주변의 사람들: 쉬운 연민을 거부하기 위해

 

누군가에겐 ‘친절하고 예쁜 아가씨’로 누군가에겐 ‘깨끗한 애’로 또 누군가에겐 ‘썅년’으로 누군가에겐 ‘개또라이’로 누군가에게는 ‘근무태도가 성실한 직원’으로 기억되는 광자. <햇빛샤워>는 죽은 광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인터뷰를 첨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들은 광자에 대해 개별적으로 증언하지만 그 어떤 증언도 그녀의 존재를 제대로 알려주지는 못한다. 그러한 미끄러짐이 이 연극의 구조를 지탱하는 핵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사람을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것에서 출발해야한다. 그러나 어떤 관계맺음들이 종종 그러한 승인을 방해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 착각들이 만든 또 다른 관계들과 그러한 관계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살면서 우리가 정작 들여다보아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햇빛샤워>의 무대 한 가운데는 커다란 씽크홀이 뚫려 있다. 연극의 처음과 끝에 등장인물들이 그 씽크홀 주변을 걷다가 놀라 뒷걸음치는 장면이 펼쳐진다. 안전표지판이 둘러쳐진 그 곳은 바로 광자의 침대가 놓여 있는 반지하 방이다. 씽크홀 주변의 사람들처럼 누구도 그렇게 캄캄한 암흑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인생에서 속절없이 허방을 짚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구멍 난 인생을 메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악착같이 살 때 그 악착을 모른 체 하지 않았는가, 극복하지 못한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고 눈감지 않았는가, 그 구멍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씽크홀 안에서 죽은 광자와 동교가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햇빛샤워>가 남긴 질문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성찰이라기보다는 서늘한 드러냄에 가까워보인다. 성찰은 공감과 연민을 필요로 하지만 우선 우리는 손쉬운 연민부터 거두어 내고 햇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난 그 암흑 자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