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회항’과 ‘대관 탈락 사태’/ 우상전

KAL의 ‘땅콩 회항’과 ‘대관 탈락사태’

우상전 (연극배우)

한국사람 치고 기내난동을 부리며 사무장을 내리게 한 안하무인적 행동을 한 KAL의 조현아부사장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법처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재벌 3세로서의 방자한 태도에 모두가 고개를 내젓고 있다. 왜? 지금 한국은 약자에 대한 보호본능이 최고조에 올라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사회는 지금 강자에 의한 ‘갑(甲)질’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다. 인권향상의 희망을 피부로 느끼게 하고 있다.
그런 참에 재벌 오너에 의한 최고도의 ‘수퍼 갑질’ 사건이 발생했으니 조현아 부사장은 당연히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민주화 시대에 모두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게 해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물론 나 또한 이런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을 한번 뒤집어 보자.
오너인 부사장이라는 여자가 기내에서 난동을 부릴 때, 또 그가 사무장을 향해 내리라고 외치며 비행기를 돌리라고 명령을 할 때, 이를 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부사장이 타고 있던 KAL기의 ‘기장’이다!
우리는 세월호 침몰에서 ‘선장’의 임무와 처신에 대해 얼마나 많을 생각을 했으며 수많은 국민이 어린 학생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그를 향해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래서 우리는 배나 비행기에서 선장이나 기장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하고 거대한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월호 선장이 사형선고를 받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졌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번 ‘땅콩 회항’에서는 누구도 기장의 잘못을 탓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부사장이 탄 비행기의 기장이 부사장의 명령을 거역하고, 비행기를 세우고 운항규칙을 들어 ‘뉴욕경찰’을 부르든가, 또는 연락을 취함과 동시에 부사장을 내리게 해서 현지에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엄중한 조치를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으면 한국의 이미지와 국격(國格)이 엄청 올라갔을 것이고, KAL은 세계 최고의 항공사로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구도 기장의 이런 처신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혹 많은 사람들이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기장이기 전에 집안의 가장인 그가 직장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오너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기장의 뒤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상위의 좋은 ‘노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조종사노조’다. 내가 국립극장에서 단원노조를 하면서, 우리와 같은 공공연맹에 속해 있는 ‘조종사노조’를 알 게 되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당시) 연봉을 1억 이상을 받는 사람들이 조직한 유일한 노조는 ‘조종사노조‘ 뿐이었다. 한마디로 ’부자들의 노조‘였다. 그래서 명확히 내가 기억하고 있다.
그런 노조가 버티고 있는데 무서울 게 무엇인가! 그런데도 기장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외려 KAL이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럼 왜 그랬을까? 상대가 너무나 막강한 자기 회사의 오너여서 주눅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오직 재벌3세인 오너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강박감밖에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분명 나의 판단이다.
더 정확한 표현은 기장이 KAL이라는 조직문화에 너무나 숙달되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죽하면 KAL의 조양호회장이 나서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들자!”고 외치고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를 ‘귀담아 듣고’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다시 말해 올바른 ‘을’의 자세를 논하는 사람이 없다. 왜? ‘을’의 과오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오너가 ‘갑질’한 죄가 더 크고 심각하다고 여기는 여론이 지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시대에 ‘갑질’이 우리 사회의 최고의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여서 그럴 것이다.
가령 옛 국립극단을 해산시킨 게 당시 유인촌장관이라고 연극인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백성희, 장민호 원로선생을 위시한 단원들은 그때 어떤 태도를 취했나를 떠올려 보면, 심각성은 노(NO)라고 말하지 못한 단원들에게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특히 연극판에서는 제대로 노(NO)라는 말을 못해서 그냥 넘기다가 되레 크나큰 위기를 맞고 있는 현실이 내가 보기에 하나 둘이 아니다.
나는 이번 ‘대관탈락’사태를 심사를 맡은 평론가들이 (연극사상 처음으로) 연극계를 향해 노(NO)라고 말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싶다.
하지만 불행이도 ‘노’라고 말한 심사위원들이 뒷수습을 잘하지 못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누구나 다 ‘갑’이자 동시에 ‘을’이 되어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이게 인생의 순리다. 즉 어느 때는 ‘갑’이 되고 어느 때는 ‘을’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협은 한팩에게는 ‘을’이지만, 연극인들에게는 ‘갑’으로 행세해 왔던 게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 우리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철하게 우리의 현실을 조망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지난 7월 1일자 (www.ttis.kr) ‘오늘의 연극’에 ‘서울연극제를 지속해야 하는가?’란 의구심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하긴 나뿐만이 아니다. 평론가협회는 연극제 합평회을 통해 ‘서울연극제’의 문제점을 거론했고, 이를 경향신문이 대서특필했다.
서협이 연극인들의 ‘갑’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가에 대해 비판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서울연극제’는 그런 점에서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박장렬회장은 공공연히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 선거 때면 특정인의 선거운동에 나섰고, 심사와 시상의 공정성을 방관하기도 했다는 지적을 그동안 받은 온 게 사실이다.
더욱 ‘갑질’로 보이는 한 것은 서협이 연극인들의 이런 비난이나 불만에도 ‘못들은 척’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서협에게 한팩이 서울연극제를 ‘대관탈락’시키자, 이번에는 서협이 ‘을’로서 한팩의 ‘갑질’을 크게 부각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사건의 본질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연극인들의 서울연극제의 운영에 대한 어떤 불만도 침묵으로 묵살했던 서협이 이번 사태에서는 잽싸게 ‘비상대책위원회’ ‘연극탄압’, ‘성명서낭독’, ‘기자회견’, ‘명예훼손고소’와 같은 식상한 정치권에서 주로 사용하는 투쟁과 구호를 흉내 내면서, 사건을 정치투쟁으로 몰아가면서, 공공기관에 압박받는 ‘을’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런 변신이 가능해진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사태가 터져 나왔을 때, 연극제 대관에 노(NO)라고 말한 대관심사를 담당했던 연극평론가 3인이 (그렇게 알려져 있음) 앞에 나서서 “왜 대관을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서 그렇다.
그러니까 심사위원들이 서협과 서울연극제가 어떻게 나름 ‘갑질’을 하고 있었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한팩의 뒤로 숨어버리는 비굴함을 보여서 그렇다.
처음부터 그들이 서울연극제의 운영상의 문제점과 그로 인한 탈락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으면, 어설픈 정치투쟁이 아닌 서울연극제의 전반적인 운영을 개선시키는 논의의 장으로 방향이 잡혔을 것이다.
그런데 심사를 맡은 평론가들이 이를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사태가 엉뚱하게 한팩의 ‘갑질’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한팩과 문화예술위원회는 ‘갑질’을 하는 공공기관으로 낙인찍히게 되고, (우리 사회에서 공공기관은 ‘갑질’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던 참에) 연극인들에게 나름 심사와 시상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서협이 갑자기 힘없는 약자인 ‘을’이 되어 버리는 ‘변신’을 모두가 목격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공공기관이 약자인 연극계를 괴롭힌 ‘조현아 부사장’처럼 보이게 사태를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KAL의 기장처럼) 심사위원들의 ‘보신적’ 행동은 논의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연극평론가인 심사위원들은 KAL의 기장처럼 비난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얻게 된 게 사실이다.

대관심사의 주체는 ‘심사위원’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전에 한팩의 대관심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그때에도 한팩은 대관을 신청한 단체들에 관한 그동안의 실적이나 공과를 심사위원들에게 브리핑했다. 참고자료를 제시하고, 또 나름 ‘문제단체’가 어떤 단체인가를 극장주의 입장에서 의견으로 개진하기도 했다.
즉 그동안 대관에서 특정단체가 ‘특혜’로 다른 단체에 비칠 요소는 없을까 해서 자주 대관이 이루어진 단체를 열거하기도 했다. 또는 그동안 대관에서 유료관객을 동원한 실적 등을 (자기들의 의견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또 지난 공연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를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극장책임자로서 당연히 심사위원들이 알 수 없는 업무상의 문제점 등을 브리핑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아마 이번에도 한팩은 서협과 서울연극제의 횡포(?)를 입에 침이 튀도록 심사위원들에게 고자질 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브리핑을 통해 한팩이 ‘갑질’을 하려고 해도 심사위원이 이를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왜? 어쨌든 심사가 비밀투표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또 심사위원들이 나름의 (담당자를 향한 질문 등을 통해) 판단기준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심사위원들이 (오너의 의견을 무시하고) ‘기장’이나 ‘선장’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대관탈락’은 심사를 담당한 심사위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따라서 대관의 최종결정권은 전적으로 심사위원들의 의사에 달려있다. 따라서 탈락은 전적으로 심사위원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인 게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도 서협과 연극제 집행부는 (심사위원들의 침묵을 기화로) 이를 여론에 유리한 (한창 우리 사회의 최대 이슈로 부각한) 한팩의 ‘갑질’로 국면을 전환시키는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동안 정치권으로부터의 학습이 크게 공헌한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그동안 서울연극제가 어떻게 운영되었으며, 어떠한 불합리와 부조리가 있었는가를 연극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 서협은 공공기관으로부터 압박받는, 아무런 힘도 없는 불쌍한(?) 서울연극협회라는 약자(을)로서 위상을 낮추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연극제를 통해 각종 심사와 시상에서 ‘갑’으로 활약하면서 많은 연극인들의 불만을 샀던 서협이 이제는 ‘을’이 된 것이다. 대극장에서 ‘레미제라블’공연 등으로 위세를 떨치던 서협이 이제는 구박받는 서협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연극인들에게 ‘쥐꼬리’만한 지원금을 주면서 ‘갑’으로 행세하던 서울연극협회가 하루아침에 한팩의 부당함에 치를 떠는 ‘을’로 탄생하게 된 것을 연극인들이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심한 평론가들

좌우간 이런 사태를 유발시킨 평론가들에게 정말 ‘존경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 정도의 심성과 지성을 가진 평론가들이, 우리 연극계에서 그동안 (각종 비평의 글과 심사와 시상을 통해서) 좌지우지 행세를 하고 있었는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게 사실이다.
또 서협과 집행부의 정치적 감각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서협은 심사자인 평론가들과 논쟁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서울연극제의 운영상의 여러 가지 문제점 등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싫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평론가들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또 평론가들도 ‘소나기는 우선 피하고 보자’는 면피정신으로 자기 집에서 칩거하고 일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이번 사태의 핵심인 장기간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서울연극제를 지속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하는 진지한 논쟁의 장이 이제는 엉뚱한 정치판의 싸움처럼 변질하게 된 것이다.
결국 심사를 담당한 평론가들의 무능한 처신으로 서협과 연극제 집행부는 연극제 운영의 면죄부를 받게 되고, 서협의 박장렬회장은 공공기관인 한팩의 ‘갑(甲)질’과 싸우는 투쟁열사로의 변신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연극적 현실을 감지한다면, 한팩과 한국예술위원회는 ‘책임회피’만을 내세울 게 아니라 좀 더 연극인들을 위한 새로운 정책적 제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연극계의 지원을 위한 더 좋은 정책과 대책을 제시하는 성의를 이번 사태를 통해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전에 평론가들이야말로 앞으로 5년 동안 일체의 심사와 시상, 비평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글을 ‘오늘의 연극’에 올린 적이 있다. 아마 내 글을 읽은 사람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나를 향해 욕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내가 옳지 않은가! 한팩이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을 심사위원으로 기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연극계는 “그래 그렇게 평론가들 좋아하더니 잘 됐군!” 이렇게 속말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또 지금과 같은 이런 낭패는 피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심사를 해서 ‘탈락’을 시켰으면, 아마 나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서 서울연극제의 문제점을 제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왜? 이제는 우리에게 남겨진 서울연극제의 숙제를 우리 스스로가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영을 위한 지원금, 심사와 시상의 공정성, 미래의 비전 등을 우리가 풀지 않으면 누가 풀어주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번에 심사를 담당한 평론가 3인은 스스로 연극계를 물러나는 게 도리라는 게 나의 견해다. 평론가로서 논리를 제공하고 담당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연극판의 물’만 흐려놓은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박원순시장과 ‘박(朴) 트리오’

모두 다 아는 일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시정을 잘 운영해, 당시 인기 없던 야당의 후보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재선에 성공하므로 해서, 다음 대통령이 될 대선 후보로 박원순시장이 가장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박시장이 어째서 주변의 문화계 인사들 때문에 항상 구설수에 오르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한동안 세종문화회관의 박인배사장 때문에 곤혹을 치루더니, 이제는 서울시향의 박현정대표 때문에 또 구설에 오르고 있다. 인권을 중시하는 박원순시장이 ‘막말’ ‘성추행’ 등의 비인격적인 처신을 한 박대표 때문에 곤혹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 박시장이 임명한 사람들이라고 치자. 왜 연극인들이 선거로 뽑은 박장렬회장이 박원순시장의 인맥으로 구분되어 정치편향성의 대상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한마디로 화제의 ‘박트리오’에 끼이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자업자득일까? 공교롭게도 모두 다 ‘박씨’ 성을 가진 분들이라는 것도 신기하다.
어쩌면 박원순시장의 ‘대선가도’에 이들이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자칫 이로 인해 대선가도에서 대박이 아닌 ‘박’(머리)이 떠질지도 모를 일이어서 걱정이 앞선다.
이번 ‘대관탈락’ 사태의 기자회견에서도 박장렬회장의 정치편향성에 대한 질문이 나온 모양이다. 실제로 서울 연극인을 대표하는 공인인 박회장이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않으므로 해서 오는 불이익과 구설수는 우리 연극인들로서도 견디기 힘든 사안이다.
지금의 ‘대관사태’도 앞뒤가 꽉 막혀 풀리지 않는 근본 이유가 박회장의 정치편향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나의 견해다.
나는 지난번 글에서 “이번 서울 연극제는 누가 보아도 서울시장 선거운동라고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엉뚱하게) 선거기간에 난생 처음으로 서울연극제를 서울시와 공동주체를 한다고 박장렬회장이 떠벌렸기 때문이다. 또 박회장이 그동안 보인 정치편향성 등을 고려할 때, 이건 분명히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보이게 한 게 사실이다.
거기다 더욱 불만스러운 것은 공동주체인데도, 서울시장으로부터 한 푼의 지원금도 받지 못해 초라하고 부실하게 서울연극제가 치러진데 있다. 어쩌면 박시장은 지원금을 주는 것이야말로 ‘선거법 위반’으로 여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좌우간 서협을 중심으로 한 ‘선거운동’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 올만큼 파워가 있었다면 박장렬회장은 선거법 위반으로 최소한 벌금형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연극계가 전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보이지 못하다보니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연극인들의 입장에서는 박장렬회장을 위시한 일부 연극인들의 정치편향성 때문에 불만이 많다. 자체 자금조달에 의한 협회의 운영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겨우 지원금으로 유지되는 연극협회가 왜 현 정부와 정치적으로 대결구도에 있어야 하는지? 이게 조금도 우리들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불만을 터뜨리면 이렇게 대꾸를 하는 연극인들이 있다. “정치보복을 하는 현 정부의 태도가 나쁘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지난 김대중, 노무현정부에서 모든 문화계 인사는 이른바 민예총의 인물들이 다 독점하고 있었지 않았나? 대표적인 인사가 ‘김명곤장관’일 것이다.
이런 인사편중에 대항하는 예총계열의 단체는 없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보수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정치보복이니 편중인사니 하는 말이 나온다. 여기에도 ‘종북’이 침투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물론 이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게 정상이고 좋은 나라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박원순시장이 최대주주인 세종문화회관 주변은 그와 가까운 민예총 인사들로 모두 포진되어 있다. 그리고 박시장은 그런 인사와 단체에만 지원금이나 후원금을 지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예총인사인 박장렬회장은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그저 거기에 끼어들어가 있을 뿐이다.
이번 사태를 접하면서, 많은 연극인들의 소망은 “서울연극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둘 것은 서울연극제가 지속하려면 우선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가 바로 넉넉한 지원금을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확보하는 것이다. 공연장 대관이 아니다.
지금 연극판의 어떠한 행사나 정책수행도 정부나 지자체의 경제적 후원이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몇 명이 철없이(?) 나대다가 결국 보수정권의 미움을 사 제대로 된 지원도 못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서협의 지지세력인 서울시가 전적으로 지원을 담당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서울연극제를 지속시켜나갈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저 극장 대관날짜만 주면 연극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전혀 서협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박장렬회장도 박시장을 상대로 이를 해결할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게 현실이다.
사실 대관이야, 내년에 또 받아내면 되지만 지원금은 어디서 구해 올 것인가? 지금처럼 지원금이 허약한 상태에서는 차라리 연극제를 중지하는 게 더 연극계를 위해서 합당한 일로 여겨진다.
초라한 연극제를 보고 관객들이 실망해 연극공연장을 찾지 않기 보다는 아예 안하는 게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누구도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서울연극제는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만 외치고 있다. 누군들 가만히 앉아서 이런 ‘립서비스’인들 못하겠는가!
거기다 정치구호와 투쟁만을 외치고 있다. 그것인들 누가 못하겠는가! 아무리 추워도 아르코 대극장 앞에서 한 시간정도 서서 ‘일인 시위’를 하는 것은 자기의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돈을 구해 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능력이 탁월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자기 ‘정성’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앉아서 원로부터 ‘미생’에 이르기까지 “서울연극제는 지속되어야 한다!”며 아무 대안도 없이 ‘입만 놀리고’ 서협 사이트에 글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글을 올려서 지원금이 생긴다면 내가 몇 달이라도 매일 글을 올려보겠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개인적인 노력이나 정성을 마치 연극계를 위한 헌신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건 집단행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서 터득한 착시현상일 뿐이다. 그때와는 처지가 다르다.
민주화시대에는 개인적인 ‘립서비스’보다, 또 정치적 구호보다, 실리를 가져오는 실천적 행동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 거다.
‘서울연극제’ 파행의 주요한 원인은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한데 있다. 그런데 전혀 지원금을 얻어 올 처지에 있지도 못한 인사들이 ‘생색나는’ 좋은 말만 앞세워 마치 연극계의 열사마냥 ‘자기최면’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너무 무책임하게 보일 뿐이다.

왜 연극이 점점 더 낙후해 가고 있는가?

지금 한국연극이 점점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중요한 원인은 젊은 연극인들의 정치 편향적 사고와 태도에 기인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우선 연극 창작자의 이념의 편협성이 관객들(국민)의 보편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는데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나다. 따라서 연극의 생존을 위해서도 우리 자신의 이념의 전환과 개방이 절실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사회적 이념만 투철하면, 마치 자신을 대단한 엘리트라고 여기는 착시현상이 만연해 있는 게 현실이다.
또 하나는 이런 이념에 사로잡히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점점 좁아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복지만 해도 그렇다. 이를 외치면 굉장히 앞서 나가는 엘리트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복지를 하려면 누군가가 돈을 내놓아야 가능해진다. 그게 아니면 동해바다에서 석유라도 솟아 나와야 한다. 그런데 누구도 이런 재원 마련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경멸하는 재벌들이 내놓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자기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붙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흔쾌히 돈을 내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거기다 항상 정치적 소용돌이로 정정이 불안한 분단된 나라에서 기업가들이 자기들의 재산을 내놓으려고 하겠는가! 기회만 있으면 공장을 동남아로 옳길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이런 꽉 막힌 사고에 빠져있는 대표적 집단이 바로 연극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러니 뮤지컬에 치여 가난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다.

혹 ‘전국연극제’에 참가하면

현재 한협과 문예위가 관장하고 있는 ‘전국연극제’는 지자체의 지원과 문예위가 5억을 지원해 비교적 충족하게 치러지고 있다. 지난번 군산의 ‘전국연극제’의 경우는 시에서 10억을 지원했고, 올해 개최가 예정된 울산시의 경우는 시에서 14억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올해 ‘전국연극제’는 19억으로 치러지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명색이 수도 서울의 서울연극제는 2억9천만 원이 전부다. 그런데도 서울의 연극인들은 사리 판단도 없이 ‘서울연극제’가 없어질까 보아 덜덜 떨고 있다. ‘가난이 체질화’ 되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이런 처지라면 외려 없애는 게 지당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는 발상의 전환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서울연극제’를 주관하는 서협을 한국연극협회의 서울지방지회로 격하시켜, 서울연극제를 ‘전국연극제’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시를 지방 도시로 격하시켜서 ‘전국연극제’에 참가하도록 하는 것이다.
매년 ‘서울’에서 개최할 게 아니라, 지방 도시로 순회하면서 개최하는 ‘전국연극제’에 참가하게 되면 비용도 절감되고 서울시에 지원금을 크게 기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미 ‘서울연극제’의 공연수준도 지방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거기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는 게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자로 나서게 되어, 우리는 서울시를 대표하는 우수공연작으로 뽑혀 축제의 참가비를 서울시로부터 조금만 제공받으면 되고, 몇 년에 한 번씩 서울에서 개최 시에는 지원금을 조금 내어 주최자가 될 수 있어 서울시가 매년 지불하는 지원금 걱정도 덜게 될 것이다.
지금 SPAF(서울국제공연예술제)도 이름만 ‘서울’이지, 지원금은 정부와 분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서협이 매년 한팩과 대관 등으로 다툴 일도 없게 될 것이고, 서협이 여전히 ‘전국연극제’ 참가작을 선정하게 되어 기득권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서협 회장이 앞장서 민예총에 기울어져 있는 서울 시장후보 선거운동 등에 나서다 눈총을 받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관탈락 사태는 연극계의 판도를 바꾸는 개선을 위한 불행 중 다행인 최고의 호기가 되는 셈이다. 이제는 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번 사태가 연극계에 생산적인 일이 되려면

어쨌든 이번 사태가 연극인들에게 좋은 결실을 맺게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안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 이번 기회에 35년이 된 서울연극제가 이제는 ‘유통기한’이 다 된 것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연극계에 ‘협회’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연극판의 ‘시스템’도 이제는 유통기한을 다 한 게 아닌가를 따지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협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기구를 구성해 연극계를 운영하는 게 미래를 위해서 더욱 합리적인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1. ‘협회’란 무엇인가?

협회란 한마디로 동종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친목과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종사원들로 구성된 단체다. 그래서 운영도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연극협회도 당연히 회원들에 의한 회비로 운영하는 게 맞다. 즉 협회원들의 자기 부담이 원칙이다. 그런데 연극협회는 이게 불가능하다. 따라서 별도의 지원금에 의존해야 운영이 가능한데, 이게 매사에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의 협회에 지나치게 지원금이 많거나 이권사업, 또는 기득권이 주어지면 안 돼는 이유는 우리에게 지난 시절의 한국배우협회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협회가 자체적으로 운영비를 조달하지 못하면 자연히 여러 부대행사의 지원금 등에서 일부 운영자금을 구해 부족한 운영비를 충당하게 되는데, 바로 ‘서울연극협회’의 비극(?)도 여기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연극협회가 운영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독재시절부터 정부가 각종 업종을 통제, 관리하기 편리함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독재정부가 협회를 구성토록 해서 한 곳에 사람들을 모아, 이를 정부기구(문화부)가 관리 통제하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배우나 연출가 등의 특정협회는 이런 정식적인(?) 성격도 부여받지 못한 채, 겨우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명칭만 협회인 사설단체에 불과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정부의 입장에서는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더 유용(?)하기 때문에 존속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협회가, (자체적으로 운영이 불가능할 시에는) 민주체제에서는 어울리지(?) 않은 시스템인 게 사실이다. 우선 협회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어야 협회장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지 못하니 협회원이 매사에 회장의 책임을 묻기 힘든 건 당연하다. 거기다 협회에 가입비가 없어 가입하지 못하거나 회비를 납부하지 못하면 회원으로서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소외자’가 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가난한 젊은 연극인들의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거기다 일정한 인원을 구성하지 못하는 단체는 가입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정작 약자인 연극인들은 회원으로서 혜택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
또 하나는 개인회원들이 회비를 내기 힘드니, 당연히 단체의 구성원보다는 단체를 꾸려가는 ‘대표’들을 위한 기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정부의 복지정책도 개인에게 집중되고 있는데, 우리의 협회는 개인에 대한 혜택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단체를 위한 ‘대표 지원’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체제가 협회여서 연극계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노조를 만들어 활성화하는 방안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소외된 약자들이 정부나 지자체로부터 직접 복지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게 진정한 진보이고 좌파의 정신일 것이다. 헛된 정치구호만 외친다고 진보적 인사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의 인식을 변화시킬 젊은 인재의 배출을 꿈꾸어야 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대학을 통해 이런 인재는 발굴되지 않고 ‘비생산적’인 구호만 외치는 사람들뿐이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2. 협회가 왜 ‘연극제’를 하는가?

서울연극협회가 ‘서울연극제’를 하는 목적은 (애초에는) 창작극을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연극은 유치진, 차범석 선생 등의 유력인사들이 극작가여서 아무래도 극작가들의 파워가 전통적으로 센 곳이 연극계다.
지금도 서울연극제 존속을 외치는 원로들이 대개 극작가인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연극은 일찍부터 창작극에 대한 목마름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창작극을 육성하는 코스로 (당시는 대한민국연극제) 연극제에 의존해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협회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 창작극을 육성하려니 자연히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지원금을 받아 연극제를 꾸미게 된 것이다. 따라서 연극제가 협회의 지원금 규모에서 가장 큰 부대행사가 된 것이다.
그러니 협회가 ‘연극제’가 아니면 할 일이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친목보다는 연극제와 같은 부대행사를 중하게 여기게 되고, 이게 지자체나 정부로부터 협회가 공식적으로 지원금을 얻는 유일한 창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자연 협회장의 파워가 ‘연극제’를 통해 생기게 되고 이를 위해 협회장 선거가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금 한국연극협회가 전국연극제를 ‘대한민국연극제’로 격상시키려 하는 것도 이에 따라 지원금이 더 풍부해질 것을 예상해, 한국연극협회의 재정난을 덜어보려는 고육지책임을 숨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협회가 협회원의 회비로 운영되지 못해 이런 궁여지책을 쓸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축제 운영에서 부조리와 불합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귀하게 얻은 지원금으로 협회장이 선거 등에서 고락을 같이한 동료들에게 생색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된 것도 부정하기 힘들다.
거기다 정부나 지자체도 개인에게 직접 지원하기를 꺼린다. 따라서 자연히 협회를 ‘지원창구’로 하고 있어 협회원들이 나름 협회의 이권(?)에 자연히 얽히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연극제로 인해 협회장이나 집행위원회가 주최자와 심사자로서의 권위도 생기게 된 게 현실이다. 인간이 사는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3. 지춘성 이사의 발언

서울연극제의 ‘질적 저하’에 대한 나의 지적에 지춘성 이사는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서울연극제에 특정인과 특정단체가 너무나 많이 참가한다는 회원들의 불만이 있어 기회를 주고자 한 게 수준의 저급화를 가져 온 면이 없지 않다.”
언뜻 들으면 아무런 하자(?)가 없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잘 새겨들으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 단체에 기회를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저렇게 수준이 떨어진 공연에도 기회를 주는데, 왜 나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인가?” 또 “말이 좋아서 기회를 준 것이지, 결국 가까운 사람들과 나눠먹기 한 게 아닌가?” 이렇게 말이다.
따라서 각종 연극제는

1. 서울국제연극제(SPAF)처럼 별도의 독립기구로 운영하는 게 합당하다. 그래야 이런 의구심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2. 그래야 자연히 공연장을 가진 기구(한팩)가 페스티발을 운영을 하게 되어, 이번과 같은 대관탈락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독립기구의 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도 보듯이 협회가 연극제를 관장하면 (임명직이 아니어서) 실질적으로 봉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동시에 책임을 질 사람도 없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책임질 일이 없다보니, 자연히 무책임한 방만한 운영을 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구호를 외치는 불상사가 발생해도 그저 구경만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3. 그러니 자연히 선거 등에 도움을 준 사람들끼리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부조리가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심사의 불공정성이 거론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4. ‘서울연극제’를 그만해야 하는 이유

1. 이제는 서울연극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창작극 육성이 가능한 게 현실이다.
지원이 좋은 남산예술센터나 두산아트센터 등이 창작극을 훌륭히 육성시키고 있으며, 국립극단이나 명동예술극장이 나서도 얼마든지 창작극을 육성시키는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2. 이제는 극작가의 육성보다는 연출가의 육성이 더 시급한 과제다. 솔직히 서울연극제의 35년 역사를 통해서 한국의 대표 격인 희곡이 한편이라도 나왔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서울연극제’로 한국연극에서 창작극을 ‘고전(古典)’이라고 내세울 만한 작품이 한편이라도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창작 작가만을 우대하다가 연출가의 빈곤만을 부채질한 게 연극제의 역사다. 따라서 연출가들이 실력을 겨루는 페스티발이 되게 하는 게 급선무다.
또 매년 연극제를 시행하다보니, 한 푼이 아쉬운 작가들이 자기 희곡이 익어갈 시간이 없이 매년 출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연극계는 창작 작가들의 수와 수준에 비해서 창작극 공연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해 창작극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면 연극에 일반 관객들의 관심이 시들해지는 것은 사필규정일 것이다.

3. 제대로 된 후원이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연극제를 존속시키려 언제까지 정부나 지자체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가를 엄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연극제를 지속하려면 아예 지원기관이 도맡아 하도록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젊은 연극인들의 소외에 의한 불만은 고조되고 있고, 요구사항은 점점 많아지는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 연극제를 지속할 필요가 있는가에 의구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협회장들이 능력이 출중해 여기저기서 후원금을 얻어올 형편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협회장들이 재산이 많아서 자기 재산을 내놓는 처지에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배우협회처럼 지원금을 많이 주면 판만 어지러워지는 현실에서 협회가 구심점이 될 필요가 있는가를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One thought on “‘땅콩 회항’과 ‘대관 탈락 사태’/ 우상전

  1. 선생님,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가려진 진실을 들춰주시는 선생님의 지혜 덕택에 연극의 판세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깁니다. 항상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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