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쇼노트 <알앤제이(R&J)>

글_주하영(공연 비평가)

 

원수인 두 가문의 자식들의 열렬한 사랑, 하지만 불행한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 이야기!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처음 집필된 16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 있는 러브 스토리이자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관객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만큼 변주와 각색, 재창작과 재해석 또한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영문학자인 채드 앨런 토마스(Chad Allen Thomas)에 따르면, 8개의 발레와 8개의 오페라, 3개의 교향곡 외에 20세기에 영화화된 버전만 무려 100개가 넘는다. 2018년을 기준으로 지난 80년 동안 외국어 각색만도 34편이 존재한다. 토마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경향”이 있으며, 등장인물의 언어와 감정에 매료되고, “서로 연결된 관계와 인간애를 발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1) 그는 오늘날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지 또 다른 맥락에서 인물들이 표현하는 감정을 해석하고 의미를 드러낼 뿐, “사회적 압력”에 반하는 젊은 세대에 관한 ‘탐구’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음을 피력한다.2)

 

사진 제공: ㈜쇼노트

 

1997년, 미국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조 칼라코(Joe Calarco)는 엄격한 가톨릭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4명의 남학생들이 어느 날 밤, 금지된 서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발견하고, 자신들만의 연극을 펼쳐내는 작품 <알앤제이(R&J)>(원제: Shakespeare’s R&J)를 초연했다. 1998년에 오프브로드웨이로 진출한 연극 <알앤제이>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되며, “뉴욕에서 가장 오랫동안 공연된 <로미오와 줄리엣> 버전”이라는 기록을 남겼다.3) 1998년 루실 로텔 어워즈를 수상한 <알앤제이>는 시카고와 워싱턴 D.C., 일본,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거쳐, 2018년 국내에서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흥미로운 연극 방식과 배우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로 호평을 받은 <알앤제이>는 오직 관객의 선택에 의해서만 선정되는 SACA(Stagetalk Audience Choice Awards)에서 4개 부문을 수상한 뒤, 2019년 재연, 2021년 삼연을 거쳐, 최근 2024년 사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칼라코의 <알앤제이>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텍스트를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사랑’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소네트(Sonnet) 18번과 116번, 147번을 차용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독창적으로 펼쳐낸 특징이 있다. 특히 사랑의 혼란스러움과 맹목성을 강조한 짧은 여름밤에 펼쳐지는 ‘꿈’과 같은 남녀의 좌충우돌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희곡 <한여름 밤의 꿈>을 적용해 <알앤제이> 속에서 학생들이 펼쳐 보이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꿈’과 ‘환상’의 속성을 강조한다. 학생 1, 2, 3, 4로 이름도 규정되지 않은 채 등장한 <알앤제이> 속 인물들은 교복을 입고 무대에 등장해 열을 맞춰 발을 구르면서 라틴어 동사 변화형을 암기한다.

‘사랑’이라는 뜻의 동사 “Amo”의 변화형을 암기하던 네 명의 남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에너지 보존 법칙에 관한 수업을 거쳐 교장 선생님의 설교에 이른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 것”을 강조하는 설교는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의무, 태도를 강제하는 인문학 특강으로 이어진다. 학생들이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는 사회 규범은 16세기 후반 엘리자베스 시대의 가치관을 담고 있다. “순결로서 성적 품위를 지키고, 순종적인 사회질서를 보존”할 의무를 가진 여성은 “세상을 통치하는 남성” 아래에 위치하지만, “성적 매력으로 남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칼라코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1막 1장에서 샘슨과 그레고리가 주고받는 여성 비하의 대화를 삭제하는 대신, 학생들이 강압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성 역할에 대한 부분을 추가한다.

 

사진 제공: ㈜쇼노트

 

칼라코는 <알앤제이>를 구상하게 된 이유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셰익스피어 원작 속 도시 ‘베로나’가 품고 있는 억압과 규제, 죽음의 분위기를 가져오기 위해, 엄격한 시간표와 규율에 따라 움직이고 태도, 의무, 학습을 강제하는 “나치와 같은 인물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설정했음을 설명한다.4) 그는 기존의 연극이나 영화에서 제시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관계가 “엄청나게 달콤하다는 점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는 미성숙한 사랑의 광기와 억압으로 인한 “성적 히스테리아(sexual hysteria)”의 측면이 있음을 강조한다.5) 따라서, <알앤제이> 속 세계는 성적 욕망과 결투로 인한 살인, 부모의 의지에 대한 반발과 불복종을 통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금서’로 지정해, 붉은 천으로 꽁꽁 묶어 땅속 어딘가에 깊이 묻어버린 곳이다.

모두가 잠든 밤, 비밀의 장소에 모인 학생들은 바닥에서 상자를 발견하고, 금서를 감싸고 있던 붉은 천의 매듭을 풀어 책에 쓰인 글을 서로 돌려가며 읽기 시작한다.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라는 문구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며, <로미오와 줄리엣>을 ‘실연’한다. 책을 감쌌던 ‘붉은 천’은 가장 효과적인 오브제가 된다. 줄다리기처럼 펼쳐지는 두 가문의 싸움에서 ‘칼’을 대신하는 ‘붉은 천’은 줄리엣의 의상이 되기도 하고, 꿈을 관장하는 ‘맵 여왕(Queen Mab)’을 신비하게 표현하기도 하며, 결혼 초야의 이불이 되기도 하고, 독약을 마시는 장면의 감각적 미장센을 완성하기도 한다. 4개의 나무 의자와 책상들, 작문 공책과 금서, 손전등과 촛불 외에는 그 어떤 소품도, 의상도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는 관객의 ‘상상력’에 기대어 몰입을 유도한다.

 

사진 제공: ㈜쇼노트

 

칼라코는 1999년 출간된 희곡의 서두에서 「각색자이자 연출가로서의 생각」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이 목표로 한 바를 밝힌다. 그는 가부장제가 통제하는 사회에서 “억압된 히스테리”가 학생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실연”하는 과정에서 위험하게 분출되는 것이 극의 “열쇠”이며, 1953년 아서 밀러(Arthur Miller)의 연극 <시련>과 1954년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소설 <파리 대왕>이 영감의 근원이었음을 피력한다.6) 각자 맡은 인물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개인적인 상황과 감정을 반영하고, 친구들이 연기하는 인물을 바라보며 ‘위험’을 느끼는 순간, 매우 폭력적으로 상대를 학대하거나 공격적이 되기도 한다.

로미오를 연기하는 ‘학생 1’과 줄리엣을 연기하는 ‘학생 2’가 첫 키스를 하는 장면에서 ‘학생 3’과 ‘학생 4’는 상황을 공포스럽게 받아들인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사랑을 느끼는 듯 보이는 학생 1과 학생 2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당혹감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규율을 어길 경우 처벌과 체벌이 즉시 시행되는 엄격한 공간에서 “군중심리”로 발현되는 무의식적인 반응이기도 하다.7) 연극이라는 ‘환상’과 ‘놀이’의 세상이 ‘현실’과 가까워질 때마다, 학생들은 폭력적이 되거나 극단적이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 극 초반부터 소네트 147번을 적용해 이성의 힘으로는 가라앉힐 수 없는 ‘열병’과 같은 사랑의 감정을 쏟아내며, 불타오르는 ‘열정’을 드러내던 학생 1은 연극이 두 연인의 죽음이라는 ‘끝’을 맞이한 후에도, 줄리엣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사진 제공: ㈜쇼노트

 

국내 공연의 경우, 초연 당시 학생 1과 학생 2의 동성애적 성향과 사랑의 감정을 강조한 측면이 있었지만, 재연과 삼연, 사연을 거치면서 ‘메타드라마(Metadrama)로서의 연극성’과 ‘미성숙한 사랑이 품은 불같은 열정의 속성’,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원작에서 담아내고자 했던 ‘낭만적 개인주의와 엄격한 공동체의 대립’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칼라코가 출간된 희곡에서 자신의 의도를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퀴어(Queer)의 맥락을 넘어서서 획일적으로 규정된 가치와 억압에 반발하고, 자신의 결정과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쇼노트의 <알앤제이>는 끝부분에 다시 ‘꿈’과 같은 ‘환상’의 자유 속으로 ‘연극’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는 학생 1의 간절함에 결국 다른 학생들이 친구를 위해 손을 내미는 느낌을 더해, 어쩌면 밤마다 그들의 연극놀이가 현실이 바뀔 때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맥락을 추가한다.

각색자인 칼라코가 직접 연출했던 <알앤제이> 역시 시대의 변화에 맞춰 “두 번의 다른 출판 버전과 다섯 번의 번역, 수많은 프로덕션”을 거쳤고,8) 2018년에는 미국에서 네 명의 여성 배우들로만 구현된 버전이 공연된 만큼, 셰익스피어를 변주한 작품이 또 다른 ‘변주’를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국내 공연의 경우, 남학생들이 줄리엣을 비롯한 여성 인물들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복종과 강압을 인식하게 되고,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모두가 ‘공감’하고 ‘동조’하게 되는 것으로 그린다. 따라서 줄리엣을 연기하는 학생 2는 초반에 여성스러운 연기를 해야 하는 어색함에서 벗어나 성별과 상관없이,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의 강제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한 개인’을 표현하게 된다.

<한여름 밤의 꿈>의 장난꾸러기 요정이자 광대인 ‘퍽(Puck)’의 대사를 차용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헤카테(Hecate)”의 ‘달’이 지배하는 세상, 변화무쌍한 ‘꿈’의 환상을 연 <알앤제이>는 끝에 이르러 또다시 퍽의 대사를 소환한다. 연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잠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 달라고 요청하는 5막 1장의 퍽의 대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베로나 영주의 대사와 교묘하게 연결된다. ‘꿈’과 같은 연극은 아침의 태양빛에 사라지고 마는 한여름의 짧은 ‘밤’과 같이 허망한 것일지 모르지만, 매일 되풀이되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놀이이자 일탈, 축제가 될 수도 있다. 학생 1의 “어젯밤에 꿈을 꿨어(I dreamt a dream tonight)”라는 마지막 문장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연극을 통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1) Chad Allen Thomas, “Director’s Note”. R&J Program, UAH Theatre, 20 Feb 2020, p. 1, Web.

2) Ibid.

3) Adriaan Roets, “Shakespeare’s R&J: A reimagined all-male version of ‘Romeo and Juliet’”, The Citizen, 25 Jul 2019, Web.

4) John Moletress, “Eroticizing Gender in Shakespeare’s R&J An Interview with Joe Calarco”, HowlRound, 27 Feb 2013, Web.

5) Ibid.

6) Joe Carlaco, “Some Thoughts From the Adaptor/Director”, Shakespeare’s R&J, Dramatist Play Service, 1999, p. 5.

7) Ibid.

8) John Moletress, op.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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