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넥스트 페이지/ 정명문

일상과 모험, 가족뮤지컬의 가능성 

– 뮤지컬 <더 넥스트 페이지(The next page)>

정명문(연극평론가)

 

작.작사 : 한지안
작곡 : 박정아
연출 : 김태형
프로듀서 : 지혜원
공연일시 : 2014.12.17~12.23
출연 : 한성식, 양소민, 홍기주, 박한근, 김지휘, 양승리, 이현진, 안은진, 하현지, 이지수, 김수아
공연장소 : 안산문화예술의전당 달맞이극장
관극일시 : 2014. 12. 23

– 가족뮤지컬의 현주소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는 오래전부터 가족뮤지컬의 영역이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올리버>, <사운드 오브 뮤직>, <애니>처럼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전통적인 작품에서부터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타잔>과 같이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한 작품, <위키드>나 <숲속으로(Into the Wood)> 등 기존의 주제나 미덕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유형들이 그에 속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간결한 메시지와 친근한 노래로 오랫동안 남녀노소에게 사랑 받으며 공연되었다.
한국에서도 아동이 주인공인 극, 동화나 설화를 바탕으로 한 극은 지속적으로 공연되어 왔다. 하지만 동화처럼 알려진 소재를 다룬 공연은 권선징악과 같은 교훈과 예측 가능한 결말을 지녔고, 주 관객층인 아동의 시선에 맞는 재미를 담아내야하기에 어린이가 보는 극, 혹은 그 어린이의 보호자가 함께 보는 공연으로 인식되어 왔다. 근래 활성화된 ‘아동극’은 문화센터 소극장 무대에서 양산되면서 공연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못했고, 결국 아이와 관련이 없는 어른들이 일부러 선택해서 보는 공연이 되기는 어려웠다. 이렇게 동화는 ‘가족뮤지컬’이 될 가능성이 높은 소재 임에도 불구하고 ‘아동극 소재’로 묶이면서 그동안 영역이 확장되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젊은 창작자들의 동화 패러디 작품들은 이전과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거울공주 평강이야기>, <인당수 사랑가>,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는 ‘평강공주’, ‘심청가’, ‘백설공주’의 플롯을 가져오되 인물이 처한 상황을 바꾼 뒤 그들의 선택에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였다. 이런 시도들은 10년 가까이 재공연 되는 것으로 증명되듯, 친근한 소재에서 현대인의 감성을 끄집어내는데 성공하였으며 다양한 관객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족뮤지컬은 여전히 소수의 영역이다.
<더 넥스트 페이지(The next page)>는 한국형 ‘가족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서양 동화의 공통점과 ‘엄마의 어린 시절’을 연결하여 아이의 성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문제의식과 풍자도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동화 속 상황을 상호 텍스트적으로 연결하여 개연성을 높이고(인어공주와 심청은 절친한 친구이다. 인어공주가 사랑한 왕자님이 결혼한 공주가 심청이다.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둘의 행복을 위해 물거품이 된다), 다양한 인물의 속내를 통해 감정이입의 대상을 확대시켰다. 창작자는 모녀를 타겟으로 삼았지만 연인, 친구, 가족 단위의 관객도 충분히 호감을 가질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재기발랄한 이 작품의 출현이 여러모로 의미 부여가 된다.

– 공주와 엄마는 선택하기 나름?!
초등 3년생 ‘별’은 발레 선생님 티아라를 탐낸 것 때문에 엄마에게 혼나고 가출한다. 별은 공주 인형 가게를 통해 동화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어른이 된다. 동화나라의 공주들은 새엄마(백설)의 거울에게 미래를 물어보면서, 집안에만 머무른다. 그로 인해 동화나라는 이야기가 멈춰진 지루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별은 심청에게 무언가 선택할 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면 괜찮다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다른 공주들에게도 자신의 상황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한다. 청이 고민을 해결하자, 다른 공주들도 별을 따르기로 한다. 공주들은 뭐든 다해주면서 가둬둔 새엄마에 익숙해 있다가 스스로 하라는 별의 요청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무도회에서 각자의 왕자님을 만나고 인생의 새 국면을 맞는다. 한편 별에게 청의 친구 인어공주가 고민을 묻지만, 그녀의 불행한 결말을 말할 수 없는 별은 요정가게로 도망친다. 거기서 별은 자신의 엄마가 ‘전설의 공주’였음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엄마가 공주 대신 가족을 선택했고, 엄마의 행복 안에 자신이 포함되었음도 알게 된다. ‘전설의 공주’ 이야기는 별, 인어공주, 백설에게 어른의 삶, 행복의 정의, 주변에 대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고, 다음 순간을 선택하는 지침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엄마’는 여러 가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야만 한다. 지금의 엄마와 자식들은 소통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듯하다. 타이거맘, 사커맘, 헬리콥터맘 등의 호칭에는 자녀를 대하는 엄마에 대한 가치평가가 담겨있으며,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인지 헷갈리게 한다. <철부지 사회>의 저자 가타다 다마미는 아이의 자립을 방해하고, 아플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태도를 지닌 부모를 ‘몬스터 페어런트(monster parents)’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이런 부모는 아이를 본인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했다. 이 작품 속에도 자신이 믿는 세계 안에 자식을 가두는 과보호 엄마와 그로인해 무기력해진 아이들이 나온다. 동화 속 공주들(신데델라, 백설, 그레첸, 심청, 콩쥐)은 친엄마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엄마가 바뀌자 공주들의 삶도 변화된다. 뭐든지 다 해주는 엄마에게 의존했던 세계는 정지되어 있었지만,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게 되자 비로소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어떤 엄마로 어떤 자녀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그려낸다.
우린 부모는 모든 것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매순간이 처음이고,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된다. 부모가 자식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본인과 동일시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백설은 자신의 주변인들이 모두 자신을 떠나갔다고 믿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공주들을 가두어 기른다. 자식에 대한 평가가 본인에게 한 것과 같다고 믿는 작금의 부모와 유사하다. 자식이 아프길 바라는 부모는 없겠지만, 경험해야할 것을 차단하는 것은 그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던 백설은 최측근인 까마귀가 사실은 남편 ‘백마탄’왕자였고, 자신이 모두를 밀쳐냈음을 알게 된다. 백설이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한편 별은 엄마의 역할을 경험하고, 엄마의 과거를 통해 현재의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한때 ‘전설의 공주’였던 엄마는 똑똑하고, 용감했기에 공주 대신 ‘엄마’를 선택했다. 그녀는 ‘엄마’란 호칭 외엔 이름도 없고, 밥, 청소, 빨래 등 가사노동에 지쳐있다. 심지어 공주를 버렸을 당시와 그녀가 살아온 시간은 상상과는 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했고, 매 순간이 모험이었으며 그냥 그 순간이 좋았다고 한다. 등장인물들은 간절한 바람을 이루고, 자신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성장한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좌절을 통해 성숙한 어른 되기, 미래에 도전하기 등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부분이다. 공주든 아니든 자기가 하고픈 것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전제가 낭만적이면서도 솔깃하다. 이렇게 <더 넥스트페이지>는 과거의 엄마와 지금의 아이가 서로 만나면 소통의 부재가 해결될 것이란 상상을 구체화 시키되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동시에 던지기에 흥미롭다.
아쉬운 것은 백설과 엄마, 별과 엄마의 관계 뿐 아니라 왕자의 이면을 보여주는 플롯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 중 여성의 비율이 높아 상대적으로 왕자의 성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기애와 자존감을 회복하는 스토리가 확실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의 보완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가 분명하기에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되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멜로디와 상상의 시너지
이 작품에는 독창, 합창, 중창과 같은 다양한 방식의 노래가 30곡 가량 나온다. 곡의 분량만으로 중대형 급이며, 노래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게다가 대사가 많이 나오는 장면에서도 음악을 배경에 깔아서 분위기를 조성한다. 각 곡들은 등장인물의 테마에 따라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인물들은 두려움, 희망, 코믹한 상황 등 다양한 감정을 노래로 표출하고 있다.
별이가 부르는 ‘내 마음속의 비밀’의 경우 아이의 외로움을 어필하였고, 동화나라에 진입하면서 모두가 부르는 ‘꿈속의 세상’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레임을 끝말잇기를 적용한 동요 스타일로 표현한다. 청, 인어공주, 별이 1막과 2막에서 부르는 ‘전설의 공주라면’은 결정 장애를 가진 공주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역할을 하는 곡으로, 호소력 있는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도출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 새엄마 백설이 등장할 때 나오는 ‘우리는 새엄마를 사랑해’의 경우 락과 랩을 절묘하게 섞고, 후크송처럼 반복되는 가사와 빠른 비트를 통해 새엄마에 열광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불행한 과거를 회상할 때 나오는 ‘난 두려워’는 백설이 까마귀의 노래를 듣고 있지 않는다는 복선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주문을 외울 때 등장하는 ‘비밥두밥’의 경우 밥이라는 각운에 맞추어 위트있는 면모를 드러내었고, 전설의 공주가 엄마를 선택하게 된 사연이 담긴 ‘거울 속에는’은 엄마의 기쁨과 행복을 솔로 곡으로 처리하여 충분히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배치하였다.
이 작품의 장점은 단순한 멜로디를 바탕으로 하되 놀이의 방식을 적절하게 믹스하였기에 기억에 남는 곡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음악적인 차원에서 고무할 만한 사례이다. 이는 여러 번의 무대화를 통해 검증하면서 탄탄해질 수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애니메이션과 그림자는, 아이의 두려움 혹은 걱정과 같은 감성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섬세하게 활용되었으며, 오픈된 계단으로 상하가 구분되면서 각 공간에 배치된 인물의 상황을 세분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또한 배우들이 흰색 옷에 패치코트 위에 단순화 시킨 의상을 덧입어서 동화 속 공주를 재치 있게 구현한 것도 신선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중극장 규모에서 더 효과적인 접근이 가능할 듯하다. 조명, 무대장치, 소품, 앙상블, 안무 등이 총 동원되었지만 빈 공간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노래가 스토리를 담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무대화가 적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빠른 비트로 흡인력은 높였으나, 가사를 따라가기 바빠서 그 내용을 음미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점도 아쉬웠다. 멜로디를 각인시키는 것이 성공했으니 관객이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만든다면 창작 뮤지컬로 최상의 성과를 내지 않을까란 기대가 된다.

– 창작 방식의 접목과 청사진
근래 창작 뮤지컬은 리딩 공연으로 검증된 뒤 제작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뮤지컬 리딩 공연은 희곡 리딩 공연과 달리 10곡 이상의 곡을 소화해야 하기에 노래 위주의 공연이 되고, 그로 인해 공연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리딩 공연 후 무대화된 작품들은 대부분 소극장 위주의 작품이 많았다. 뮤지컬의 특성 상 제작을 누가 하느냐는 작품의 방향성을 결정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작품의 특색을 살리면서도 안정적인 공연이 되는데 소극장 뮤지컬이 위험성을 줄이는 안전한 방법 중 하나였던 셈이다.
<더 넥스트 페이지>도 2013년 CJ아지트에서 <반짝, 내 맘!>으로 숙련도 높은 배우들을 통해 리딩 공연이 된 후, 공연 가능성이 타진되었다. 이 작품은 인핸스먼트계약(Enhancement Deal : 상업 프로듀서와 비영리 공연단체와의 협업을 통한 작품 개발, 제작방식. 오프 브로드웨이의 방식 중 하나)을 통해 단계적으로 발전시킨 좋은 사례이다.
창작 뮤지컬들이 뮤지컬 전용극장에서 공연되려면 많은 시일이 걸린다. 무대의 규모를 채우기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소극장 무대에서 검증이 된 다음 규모를 확장하는 작품 대다수가 이 부분에서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더넥스트페이지>는 처음부터 중규모 이상의 형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무대를 채우는 고민이 여러모로 반영되었다는 점이 고무할 만 하다. 소극장 창작뮤지컬의 성공작이 많은데 비해, 대형 제작사의 작품 외에는 지속적으로 공연되는 창작 뮤지컬이 많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무대 매커니즘을 구현하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재, 노래, 관객 흡수력까지 갖춘 작품이 트라이아웃과 같은 협업방식을 취한다면,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창작뮤지컬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뮤지컬이라는 장르의 개발, 새로운 제작 방식의 도입, 관객의 취향까지 반영한 이 작품의 재공연이 정말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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