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을 연극의 허브로! / 오세곤

*이 글은 거창한여름연극제 부대행사 세미나 발제문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거창을 연극의 허브로!

오세곤(순천향대 교수)

 

 

  1. 들어가며

거창과 연극! 하나는 지역을 나타내는 고유명사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명사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결합력이 너무도 강해서 웬만해서는 다른 조합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지금 열리고 있는 “거창국제연극제”나 “거창한여름연극제”나 모두 이 두 단어가 들어가 있다. 아무리 아니라는 논리를 들이대도 우리의 상식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법 중에 가장 상위는 상식이라 하지 않는가? 즉 거창과 연극이 연결되는 것은 이미 관습과 상식으로 굳어버린 것이라서 쉬이 바뀔 수 없을 것이다.

거창은 연극을 버릴 수 없고 연극은 거창을 떠날 수 없다. 30년 세월의 힘으로 축적된 이 굳건한 관계는 양쪽 모두의 자산이다. 물론 지금은 최대의 위기이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일 수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벌어진 상황을 어차피 언젠가는 겪을 일이고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이런 불편한 상황 없이도 잘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을 안 벌어졌다고 할 수도 없고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다. 지금 상태에서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찾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흔히들 거창연극제가 둘로 갈라졌다는 얘기들을 한다. 물론 이 안에서야 양자 모두 펄쩍 뛰면서 갈라진 게 아니라 하나는 정말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라고 강변할 것이다. 하지만 거창을 벗어나면 십중팔구는 갈라졌다고 하거나 같은 행사가 양쪽에서 열리고 있다고 한다. 역시 논리 이전에 느낌과 상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니 법으로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즉 아무리 논리와 법을 동원해 서로 다른 것이라 주장해도 일반의 상식은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제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다수의 상식을 거스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즉 거창과 연극의 강한 결합력을 인정하고 그에 맞는 형식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상식의 권위로써 내리는 엄한 명령이고 여기 관계되는 모든 사람들의 막중한 책무이다. 즉 목적지는 분명히 정해진 셈인데 아직 어떻게 거기까지 갈지 방법을 못 찾은 것이다. 그것을 찾고 성공시키는 것이야말로 관계자들이 져야할 책임인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일단 올해 행사가 끝나는 즉시 내년 이후를 협의할 권위 있는 조직을 구성할 것을 권고한다. 여기에는 거창군, 경상남도, 문화부, 문화예술위원회 등도 들어가야 하고, 올해 출범한 거창문화재단도 들어가야겠지만, 실제 당사자로서 거창 연극인들과 함께 연극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될 필요가 있다. 사실 그 동안 거창연극제는 많은 연극인들을 운영위원으로 위촉해 왔었고 대부분은 특별한 고민 없이 그 직함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비록 느슨하지만 거창연극제는 연극계 전체와 연결돼 있었던 것이니 이제 위기 극복을 위해 연극계가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런 전제로 앞으로 거창연극제가 과연 어떤 모양과 내용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가능성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2. 관의 역할

이번 사태를 놓고 연극계 일각에서는 관의 개입을 비난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문제의 핵심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연극제와 관련하여 거창군이 나서는 것을 개입이라 할 수 있을까? 개입은 “직접 관계가 없는 일에 끼어드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거창군과 연극제의 관계는 상당히 특수하다.

2016년 연극제 예산을 통과시키면서 거창군 의회는 군에서 직접 연극제를 진행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군은 기존 연극제 운영단체와 상관없는 연극계 인사들을 초청 위촉하여 행사를 준비하였다. 역시 올해처럼 두 개의 조직이 같거나 유사한 이름의 연극제를 준비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던 중 마침 새로 당선된 자치단체장은 행사의 일원화를 추진한다. 그러나 이미 상당 정도 진행되고 있던 상황이라 쉽게 해결되지 않은 채 반발과 분란만 커지게 되었고, 결국 거창군 측이 개최를 포기함으로써 기존 연극제 운영단체 중심의 행사만 진행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작년의 경우 거창군의 행위를 개입이라 보기는 어렵다. 의회, 즉 주민들의 명령을 받아 시작했다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창군이 위촉하여 이미 활동하고 있던 연극계 인사들의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나 그들을 일방적으로 해촉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작년의 일은 관이 개입한 게 아니라 관이 일의 주체로서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공언한 대로 올해 거창문화재단을 설립하고 행사를 주관하도록 한 것도 작년에는 포기 쪽을 선택했고 올해는 강행 쪽으로 결정한 것만 다를 뿐 관의 개입이라 할 수는 없다.

개입이란 단어는 거의 부정적으로 쓰인다. 비슷한 표현으로 간섭도 있다. 흔히 문화예술과 관련하여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는 소위 “팔길이원칙”은 바로 이런 부정적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개입과 간섭의 금지”를 잘못 해석해서 꼭 나서야 할 경우에도 안 나선다면 그건 문제이다. 예를 들어 예산을 원칙에 맞게 쓰지 않으면 관이 나서서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원칙이 현실과 맞지 않으면 법규를 보완하여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거나 소극적으로 시늉만 낸 것이었다면, 또는 정작 나설 때는 안 나서고 안 나설 때는 나서서 일을 그르쳤다면 크게 지탄받아 마땅하다.

연극제에 대한 관의 역할은 일종의 배우와 스태프의 관계로 보면 된다. 비록 무대에 서서 관객을 만나진 않지만 무대 뒤에서 배우가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는 스태프의 존재야말로 연극 공연의 성패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좀 복잡해 보이지만 바람직한 관계를 설명하자면 거창군은 거창문화재단을 설립했고 거창문화재단은 연극제를 주관하는 이 관계에 있어 거창군은 거창문화재단에 대하여 스태프의 역할을 해야 하고, 다시 거창문화재단은 연극제에 대하여 스태프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3. 규모의 경제

연극제의 방향에 대해서는 여러 제안이 가능하다. 좁고 깊은 특화도 있고, 가능한 한 범위를 넓혀 이른바 규모의 경제를 활용할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 지역적으로도 멀지 않아서인지 거창연극제와 밀양연극제를 자주 비교한다. 직접 연극을 만드는 이들이 연극촌이라는 밀집된 공간에서 자기 작품을 보여 주는 걸로 시작한 밀양연극제가 좁고 깊게 특화된 경우라면 거창연극제는 상대적으로 넓은 지역에서 다양한 작품이 공연되는 연극제로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거창연극제가 선택할 방향은 규모의 경제 쪽이 맞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거창에 많은 연극 작품이 모이도록 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일종의 공연 백화점이나 아트마켓이 되면 좋을 텐데 과연 그 방법은 무엇일까? 유럽의 주요 연극제는 참가작이 보통 1,000편 이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규모의 연극제가 열린 적이 없다. 만약 거창에서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독보적인 연극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있어 해외 작품도 필요하겠지만 우선 국내 작품으로 전년도 여러 연극제 공식 초청작이나 경연 수상작들을 모두 초청한다면 어떨까? 또 같은 기간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여러 연극제 초청작들을 순회 공연시킨다면 어떨까? 여기에 여러 섹션으로 나눈 경연 참가작, 그리고 자유참가작까지 최대로 모아 본다면 어떨까? 같은 방식으로 대학생, 청소년, 어린이들의 공연도 포함시키고, 부대행사로 아마추어 동아리 연극제도 개최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극을 중심으로 하되 가능한 참가 범위를 공연 전반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극이라는 이름에 포함시킬 만한 것은 많다. 무용이나 음악, 퍼포먼스, 해프닝, 심지어 마술까지도 극적 수단을 활용한 작품이라면 모두 참여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이렇게 많은 작품이 모이도록 하려면 그만큼 예산도 많이 들 것이다. 초청 작품에는 초청료를 지불해야 하고, 경연 작품에도 어느 정도의 지원금을 제공해야 한다. 또 자유참가작에도 시설과 기자재는 제공되어야 하고, 모든 작품에 대한 홍보 지원도 필요하다. 게다가 이 많은 작품을 수용하려면 공연장도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다. 즉 평소 공연장이 아닌 학교나 종교시설, 광장 등까지도 모두 공연장으로 바꾸었다가 행사 후 원상 복귀시키려면 상당한 예산과 노하우가 필요하다.

4. 선순환 구조

어렵게 작품을 모았는데 관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이후로는 행사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로 훌륭한 홍보 아이디어로 관객을 모았는데 수적으로건 질적으로건 기대에 못 미친다면 어떻게 될까? 역시 오래 연극제를 이어가진 못 할 것이다. 또 한 번 왔는데 공연 환경이 너무 안 좋아 작품을 망쳤다면? 숙박 환경이 너무 안 좋다면? 교통이 너무 불편하다면? 결국 많은 작품이 모이고 많은 관객들이 몰리고, 하는 이나 보는 이나 다들 편하고 즐겁고,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이 참가를 원하고, 더 많은 관객이 다음에 또 오기로 결심하는 식의 선순환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3년에서 5년을 염두에 둔 준비가 필요하다. 당장 2018년도를 위한 준비와 함께 2-5년 뒤 준비까지 함께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비단 외국 작품만이 아니라 국내 작품에 대해서도 그 정도 기간을 두고 섭외하는 것이 좋다. 이제 국내 극단들도 점점 장기 계획을 세우는 추세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년 첫 해에 1,000작품을 모으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3년이나 5년 뒤에는 그것이 가능하도록 목표를 설정한 뒤 실행해 나가는 것이 좋다.

해외 연극제는 물론 그렇고 국내에서도 영화제는 아침부터 관객들이 프로그램에 꼼꼼히 표시를 해가며 상영관을 찾아다닌다. 국내 연극제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려면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 국내 연극 제작 편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서울에서만도 1년에 최소 500편은 공연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학생과 청소년 어린이, 아마추어 동아리까지 확대한다면, 또 인접 장르까지 수용한다면 국내 작품만으로도 1,000편 참여는 결코 공허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과거 젊은연극제를 갑자기 확대할 때 경험으로 서로 다른 작품을 보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전제만 있으면 자체적으로 확보되는 관객만으로도 객석을 꽉 채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올림픽 식으로 미리 규모에 맞는 시설부터 하자는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준비를 시작하되 참가팀이 확보되는 상황을 살펴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 가면 되는 것이다. 단 가능한 공간을 조사해 놓고, 필요한 자재의 구입 또는 임대, 그리고 설치 계획을 세우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숙박과 교통에 대해서도 사전 조사와 세밀한 준비를 하는 것은 언제든 쓸 수 있는 역량의 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니 결코 손해날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5. 나가며

이런 얘기를 허황된 꿈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참가작 1,000편 규모의 연극제라면 예산이 얼마나 들까? 100억? 200억? 또는 그 이상? 그것이 과연 많은 액수일까? 영화나 뮤지컬 한 편 제작비를 생각하면? 사실 이 정도 액수를 쓰는 행사는 국내에도 꽤 있는 걸로 안다. 더욱이 그렇게 막대한 예산을 쓰고도 실제 가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경우도 많다. 결국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치밀한 계획으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보고 생각조차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허황된 꿈이라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당연히 중앙정부와 광역정부도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최소한 5년의 계획을 담은 치밀한 설계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아울러 상설 사무국도 있어야 하고, 임기를 보장받는 예술감독도 필요할 것이다. 예산 확보를 위해 정부를 설득할 전문적인 위원들도 있어야 하고 주민들을 납득시킬 열정적인 관료들도 필요할 것이다.

국내 유일의 연극고등학교가 들어설 거창에서 국내 최대의 연극제가 열리고 그래서 거창이 말 그대로 연극의 중심, 연극의 허브가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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