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제와 연극상을 폐지하면?/ 우상전

 연극제(祭)와 연극상(賞)을 폐지하면?

                                      

        우 상전(연극배우)

 

 

 지난달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이해랑연극상’ 시상식을 관람했다. 참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몇 자 적어볼까 한다. 먼저, 절대로 특정인이나 특정집단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라는 말을 꼭 덧붙이고 싶다. 

 우선 긴말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내 의견보다는 수상기관인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가 쓴 칼럼을 여기에 인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건 조선일보가 연극계에 중요한 연극상인 이해랑상과 차범석희곡상 등을 주관하고 있기에 그렇다. 

 “(필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욕 얻어먹을 작정으로 이 글을 쓴다. (중략) ‘보수는 늙은 사람들의 전유물인가’ 이 기구(대한민국수호 비상국민회의)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얼마나 할지 모르나 이런 경로당 이미지로 인해 보수의 폭을 좁히는 손실이 더 크다고 본다. 

 차라리 이분들이 나서서 아끼는 후배나 제자들을 설득해 이런 비상기구를 했으면 ‘보수가 잘하면 살아날 수 있겠다’는 기대를 걸어볼 수 있었는지 모른다. 회사는 물론이고 어떤 조직도 젊은 세대를 공급받지 못하거나 길러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보수 진영에서 어떤 조직이나 단체가 만들어지면 역할의 성격과 상관없이 전직 경력이 화려한 노인들이 제일 맨 앞줄의 감투를 차지한다. 나이와 과거 관직(官職) 순에 의해 위계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80대 노인이 지시하고 50대, 60대는 애 취급받으며 움직이는 시스템이 된다. 

 보수가 정말 나라 걱정을 한다면 후배들을 키우고 그들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세워야 한다. 자신은 뒤에서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원하는 형태가 돼야 보수조직은 세상의 변화와 함께 가고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왜 수상기관인 조선일보에 영향력이 강한 칼럼을 인용하는지 잘 이해해 주면 좋겠다. 주최자인 조선일보가 연극상의 심사전반에 걸친 선처를 연극계로서는 기대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를 들여다보면, 이제 영화상은 ‘흥행 = 관객 수(數)’가 크게 작용하다. 그런데 연극상은 여전히 경력을 따지니, 연극계의 세대교체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는 연극인들도 연극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졌으면 좋을 듯하다. 

 

 

            극작가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오!

 

내가 이 글에서 쓰고자 한 근본적인 사연은, (결론부터 말하면) 창작극의 육성과 그에 따른 극작가의 지원책을 이대로 지속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를 말하고 싶어서다. 우리가 지금까지 행해왔던 창작극과 극작가에 대한 우리의 시각의 잘잘못을 한번 가려볼까 싶어서다. 

 이번 수상자인 김창일선생의 수상을 절대 폄훼하고자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니, 모두가 편견 없이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걸 기화로, 그동안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극작가’란, 또 연극에서 ‘희곡’이란 어떤 가치를 가진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한번 늘어놓고 싶어서 오랜만에 자판을 두드리기로 했다. 

 솔직히 우리 연극계는 ‘희곡’이란 어떤 특성과 가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너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극작가 중심의 현재와 같은 연극지원정책은 되레 ‘극작가’의 육성과 ‘창작극’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지 않은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 연극계는 오래 전부터 창작극을 육성하면 한국연극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집단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지금은 ‘미투’로 숨어버렸지만, 한국의 최고의 극작가라는 칭송을 받는 오태석선생의 잠적에 우리 연극계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가 없으면 한국연극은 무너진다.” 이렇게 말이다. 

 사실 난 시장식장에서 ‘김창일’이라는 극작가가 한국에 계시다는 것을, (내가 연극계에 몸담은 게 50여년에 가까워오지만) 또 그런 분이 ‘목포’에 계신지를 처음 알았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나의 불찰이고, 무지일 것이다. 

 그래서 요즘 ‘한국연극’에 ‘지역연극’에 관한 글을 연재하는 정진수선생을 뵌 김에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한심하다는 듯 “전국연극제 (이제는 대한민국연극제)에서 5번이나 대상을 타신 분이야.” 라며 역시 나의 무식함을 꾸짖는 것이었다. 

 사실 희곡계의 세계적 대가이자 최고라고 칭송받는 ‘셰익스피어’만 해도 그가 그 시대에 영국의 어느 연극제에서 희곡상을 수상을 했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희곡이 후세까지 활발히 공연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어쩌면, 외려 그 당시에 연극제나 연극상이 없어서 그의 희곡이 성공적으로 후세에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왜 이런 부질없는 소리를 하는지, 지금부터 내 글을 읽어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셰익스피어가 아무런 수상 경력이 없는데도 그의 작품이 1천년의 세월에 걸쳐 가장 뛰어난 희곡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많이 재공연 되는 레퍼토리로 자리 잡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의 희곡이 후세에 남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희곡상’ 때문이 아니라, (연극사에 의하면) 그가 오로지 관객들의 관극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또 달리 말하면 극작가로서의 생존을 위해 불철주야 끝없이 노력한 결과라고 한다.  

 그에 반해서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내가 보기에, 우리 극작가들은 생존이 아닌 연극제에 출품하기 위해서 희곡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싶다. 거기다 해마다 연극상을 통해서 수상자를 배출하는 연례행사로 창작극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커녕, 앙코르도 없이 그냥 ‘1회용’으로 버려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한마디로 연극에서의 희곡의 생명과 가치는 ‘재공연’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 나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희곡을 공연장에서 마주하고 즐기며 보느냐에 따라 희곡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희곡의 생명이 연장되고, 쓰고 버리는 ‘1회용’ 희곡이 아닌 우리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희곡의 가치는 뭐니 뭐니 해도, 그 희곡이 얼마나 많이 ‘재공연’으로 무대에서 재연되느냐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다. 

 그런데 한국연극계에서 희곡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저 연극제에서 한번 공연되고 (사용되고) 버려지고 있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다. 매년 열리는 각종 연극제에 ‘행사용’으로 쓰이다 관객들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항상 창작극 육성이라는 이름으로 매번 ‘신작’을 만들어 각종 연극제인 연례행사에 ‘납품용’으로 소모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많은 희곡이 연극제를 통해 데뷔하고 곧바로 은퇴하는 운명을 맞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판국에 시상식장에서 심사위원인 유민영선생이 말씀하시길 “이해랑연극상은 한곳에서 묵묵히 일하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에게 시상하는 상이다.”라고 말씀하시니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게 사실이었다. 좌우간 최고의 연극상이 ‘숨어 있는 달인(達人)이나 맛집’을 찾는 TV의 연예프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포스터를 붙이고 매스컴에 홍보도 하면서 ‘관객을 모아서’ 공연을 하는 게 연극이지 않은가. 그런데 ‘숨은 실력가여서 수상’을 하게 되었다고 하니, 잠시 연극의 기능이 무엇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게 사실이었다. 

 물론 이제 막 피어나는 신인이면 그나마 수긍이 갈 것이다. 그런데 아주 노년에 접어든 기성극작가를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곳에서 숨은 공로가 많다는’ 이유로 수상을 하다는 것은 정말이지 한국만의 풍경이지 싶다.  

 알려지지 않는 연극인에게 시상하는 게 ‘이해랑연극상’이라면 (모르면 몰라도) 이 글을 쓰는 내가 1순위로 받아야 할 상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일제 강점기부터 내려온 ‘연극검열’을 이 땅에서 내몰아낸 공로자라는 것을 아는 연극인이 없을 뿐 아니라, 가까이는 한때 대학로의 ‘삐끼’를 중앙일보를 통해서 몰아낸 ‘숨은 공로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요사이 ‘삐끼’가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나는 이를 미리 예견하고 서울협회 등에 재발하지 않도록 당부를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노력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뿐인가, 나는 요사이 ‘문예위의 독립’을 주장해 문화계의 이슈로 만들고, 대학로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부각시켜 대학로의 임대료 상승을 부각시켜, 포럼에 나온 서울시 문화예술과장에게 용산에 있는 (평택으로 옮겨간) 미군부지로 대학로를 이전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등 나야말로 숨은 일꾼일 것이다. 

 또 ‘화술로 배우는 연기’라는 책을 만들어 대입시를 위한 연기학원 등에서 교사들의 중요한 교재로 사용하게끔 한 숨어있는 공로자가 나 아닌가. 내 발언에 이의가 있으신 분은 댓글을 달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랑연극상’을 비롯한 연극상은 단적으로 나 같이 ‘숨어있는’ 사람이 받아야 하는 상이 아닐 것이다. 당당히 알려진 좋은 작품으로 많은 예술적 업적을 후세에 남기거나 남길 연극인들이 받아야 하는 게 연극상일 것이다. 왜? 이게 연극의 불변의 사회적 기능이자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날의 시상 이유가 조금은 구차하게 들린 게 사실이다.

 

 

          극작가는 ‘배터리’다!

 

 이 자리에서 내가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극작가는 물론이고 연극인, 또 지원기관에 근무하는 모든 분들을 향해 내가 꼭 말하고 싶은 것은 극작가는 ‘배터리’와 같다는 것이다. 

 단적인 사례로, (내가 보기에) 오태석선생은 이미 오래 전에 창작능력을 마감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이건 그분의 예술적 재능을 과소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문학, 그 중에서도 ‘희곡’은 창작자의 생명이 ‘배터리’처럼 용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나다. 

 벌써 10여 년도 훨씬 전에, 평론가 김윤철선생이 작가 오태석, 이강백을 실명으로 거론하며, 중견작가의 분발을 촉구하는 평론을 신문에 게재한 적이 있다. 그 글을 읽고, 내가 월간 ‘한국연극’에 희곡작가란 본디 50세를 넘기면 그에 대한 기대를 거두어도 된다는 식의 반박성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왜냐면 극작가는 배터리로 용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극작가가 배터리인가? 왜 배터리처럼 용량이 정해져 있는 것인가? 그래서 지금부터 나의 ‘배터리이론’을 펼쳐 보겠다. 어쩌면 연극계에서 나만 아는 비밀이 아닌가싶기도 하다. (나의 견해로는) 한 사람의 극작가가 평생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좋은 희곡을 쓸 수 있는 ‘잠재력= 용량’이 개인당 많아야 최대 3편 정도가 정량(定量)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우리와 인접 장르인 영화를 통해서 한번 확인해 보자. 영화감독인 강제규, 강석우 박찬욱, 봉준호 등의 경우에서 보더라도 – 그들은 연극으로 치면 작, 연출가들이다 – 그들이 좋은 평가를 받은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도 겨우 2,3편이 고작인 게 현실이다. 한때 환호를 받던 그들도 겨우 그 정도의 작품을 남기고 영화계에서 사라져 버린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공연되는 러시아의 안톤 체홉의 경우는 어떤가. 그의 대표작을 ‘4대 코미디’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후세에 남긴 명작이 고작 4개라는 걸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그를 얼마나 대단히 여겼으면, 소련정권에서 지식인들의 숙청을 일삼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부르짖던 스탈린마저도 그를 버리지 않았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예외다. 그렇지만 그도 세간의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워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그가 쓴 희곡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이 강세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를 밝혀야 한다는 많은 이들의 주장에 못 이겨, 결국 영국 대법원이 나서서 오랜 검토 끝에 셰익스피어의 손을 들어주었을 정도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의문은 귀족도 아닌 미천한 계급의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궁정의 상황을 그토록 잘 알고 쓸 수 있을까, 이런 의심받은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가 32편의 희곡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순수창작이 아니라 기존 이야기를 번안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단 한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도 없는 한국의 실정은 어떤가? 우리나라의 경우, 극작가들의 배터리 용량이 대체로 (평생) 1편 정도가 정량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대체로 작가의 데뷔작이 작가의 대표작을 수행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지 않은가싶다.

 이건 희곡을 쓰기가 너무 어려워 아무나 쉽게 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인지) 우리의 많은 연극인이나 지원기관원들은 극작가야말로 무한정 희곡을 뽑아내는 대용량의 배터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극작가의 배터리 용량은, 아무리 대용량이라도 대체로 3작품 정도가 정량이지 않을까싶다. 

 이런 실정이니, 우리 극작가 중에서 지속으로 그의 희곡이 재공연 될 확률은 (지금까지의 세계사적 관점으로 판단해도) 고작 1편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한편 마저도 국립극단에서 기획하는 ‘근현대극 시리즈’, 아니면 한국연극협회의 연극계 원로들을 위한 ‘늘 푸른 연극제’가 아니면 앙코르 되기도 힘든 게 현실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연극계는 이를 깨닫지 못해, 전혀 이해가 불가능해, 여전히 이미 생명을 다한 극작가들에게 연극제, 또는 기획공연, 국립과 시립극단 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서 생명을 연장시켜주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나는 우리 연극계가 이런 실정을 인지하지 못해 안타깝다. 따라서 우리가 극작가들에게 해야 할 일은 극작가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아껴 쓰도록 감시(?)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극작가들이 매년 연극제 ‘행사용’으로 자기의 희곡을 남발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극작가가 평생을 써도 후세에 1편을 남길까 말까 하는 게 세계적인 희곡창작의 현실인데, 어떻게 한국에서는 매년 연극축제 때마다 1편의 희곡을 발표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지? 그리고 ‘명작의 탄생’이라는 소망을 안고, 혹여 우리 극작가들을 들볶고 있는 건 아닌지, 혹여 몇 푼의 지원금을 베풀어 그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원로급 평론가인 한예종의 이미원교수 같은 분들은 공개적인 포럼에서 “국립극단은 창작극만 해야 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런 주장은 “극작가들 뭐하십니까. 빨리빨리 배터리를 소모하세요! 창작극이 없으면 우리 평론가들의 일감이 없어진단 말이예요.” 이런 외침처럼 들린다.

 지금이라도 이제는 연극계가 모두 나서서 작품을 남발(?)하는 극작가들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왜? 정말 연극에서 극작가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니, 옛 국립극단에서 한국에서 고전이 된 창작극 공연을 하려고 해도 마땅한 희곡이 없어 항상 고민을 한 게 현실이었다. 

 따라서 극작가들은 이를 인식하고 자신들의 많지 않은 ‘창작배터리’의 용량을 매년 연극제나 창작산실을 위해 몇 푼의 ‘원고료’를 받고 허비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들의 많지 않는 재능을 겨우 ‘범작(凡作)’으로 날려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나의 이런 논리가 너무 편협하고 지나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심각하게 여겨야 할 것은 희곡작가들의 명작을 양산할 에너지는 절대로 많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제는 연극제를 그만두자!

 

 이런 현실인데도 왜 우리는 연극제 행사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그건 우리가 좋은 창작극에 대한 소망을 멈추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연극제’를 통한 창작극의 예술성 훼손을 걱정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극작가들도 문예위의 지원금 몇 푼으로는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연극제의 당첨이나 수상의 유혹을 버리고, 이제는 후세에 남을 명작의 탄생을 위한 노력을 검토할 때가 되었다. 왜? 용량에 한계가 있는 자신들의 재능을 아무렇게 날려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연극제에서 수상작이 됐다고 해서, 또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극장 무대에서 다시금 리바이벌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관객들로부터 나의 수상작이 호응을 받는 처지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말하면 흔히 ‘상업극’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상업극, 흥행성’이 아니다. ‘시대의 초월성’과 인간 삶의 ‘보편적 진실성’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거기다 수상은 ‘상대평가’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절대적 평가를 자신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관객들로부터 앙코르를 받을 수 있는가를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사이 지역연극제에서 자주 공연되는 작품으로 목격되는 (춘천도립극장의 예술감독인) 작가 선욱현의 ‘의자는 없다’는 우리의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희곡이란 재공연, 리바이벌 되는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야 영원히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저 연극제의 행사용으로, 1년에 한 번씩 지원금(원고료)을 받으려는 듯 발표되는 작품처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고전(古典)으로 당당히 남아서 길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게 희곡이다. 왜? 희곡은 글로 남기 마련이고, 명작의 탄생은 너무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작신작’위주의 지원책을 개선하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연극계의 ‘창작극’ 위주의 지원책, 그것도 ‘신작’ 위주의 지원책은 분명 연극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연극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든 게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 연극계가 시급히 개선해야 할 것은 기존의 극작가지원정책을 제작자를 겸하는 ‘연출가’ 중심으로 하는 지원책으로 시급히 전환시키는데 있다. 

 여기서 ‘연출가’로 전환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한국연극의 가장 심각한 적폐가 (희곡심사와 연극제의 심사 등) 일체의 심사가 ‘연극인’이라는 심사위원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심사나 시상이 ‘관객’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 영화의 경우 관객(흥행)에 의해서 결정되니 새로운 신인과 새로운 감각의 영화가 끊임없이 창출되고 있는데 반하여 연극은 여전히 연극인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해서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갇혀버린다는 현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도 지원책이 제작된 공연으로, 즉 관객의 호응도에 따라 결정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현상들로 인해 연극계가 크게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숨어있는 극작가’에게 시상을 하는 경우는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든 시상이 공로상으로 변질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이다. 

 그리고 (서울연극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태석, 이강백 등의 유명 작가들의 희곡이 매년 연극제에 맞추어 출품되는 과거와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그래서 작가들이 매년 연극제에 맞춰 작품을 쓰느라 지나치게 배터리를 탕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시스템으로 인해 ‘명작’, 즉 후세에 남을 고전(古典)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를 연극계가 걱정할 때가 되었다.   

 어찌 인간의 예술작업이 어떻게 해마다 짓는 농사마냥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시기를 맞춰 행해져야 하는지, 또 우리의 희곡은 데뷔에서부터 연말 신문사의 응모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이제는 심사숙고할 때가 되었다. 

 따라서 지원책을 ‘연출가’로 바꾸면, 작가들이 연극제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늘 열려진 마당에서) 좋은 희곡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원고료를 지원받고, 수시로 자기의 희곡을 원하는 극단을 골라 (연출가를 선택해) 희곡을 발표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들이 일 년에 한번 개최되는 신춘문예에 맞춰 등단하고, 5월에 시행되는 서울연극제에 맞춰, 또 창작산실의 공고가 나가는 시기에 맞춰 작품을 쓰지 않아도, ‘창작’의 열정이 솟아날 때마다 작가들이 자기의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작가들은 블랙리스트와 같은 날벼락도 피하면서, ‘때’에 맞추어 자기의 희곡을 발표하려고 늘 노심초사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대신 좋은 명작이 나왔다는 판단이 서면, 즉 작가의 배터리가 대용량임을 확인하면 고작 원고료 몇 푼을 작가에게 쥐어줄 게 아니라, (후속 두세 작품의 창작을 위한 배터리가 남아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되면) 평생을 충분히 먹고 살만큼 대대적인 후원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과 같은 적폐가 만연한 것도, 연출가에 대한 지원이 허약해 한국에 유수한 연출가가 탄생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나다. 러시아에서 보듯, 훌륭한 연출가들에 의해서 체홉의 희곡이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 것처럼 우리도 이제는 연출가를 위한 지원책으로 발상을 전환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도 연출가들에 의해서 기존의 희곡이 재창조되는 기쁨을 맛본 적이 없다. 그동안 우리는 극작가를 우대하는 것만이 우리 연극의 발전정책인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연극제를 마치면 그와 동시에 수많은 희곡이 사장되고 마는 현실을 매년 목격하고도 전혀 두려움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오태석 선생 같은 분은 다른 사람이 자기의 희곡을 연출하지도 못하게 막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금을 받은 희곡마저도 저작권(權)을 내세워 자신만이 그걸 소유하겠다고 하는 건 좀 이해하기 곤란하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창작극 육성책의 풍경이었던 걸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 점에서도 이제는 지원책을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연출가 위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그들을 통해서 (체홉의 희곡을 연출가들이 살려내듯이) 이제는 신작보다 리바이벌에 더 많은 관심과 시선을 집중할 때가 되었다. 

 좋은 극작가는 귀하고 명작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연출가는 그런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동안 쏟아낸 희곡이 사장되지 않고 길게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특출한 연출가의 재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자. 따라서 이제는 연출가를 통해서 연극계가 발전을 모색하는 발상의 전환이 긴요하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지금처럼 한국사회가 극도로 정치적 이슈만을 좇는 시대에는 극작가보다는 연출가를 육성하는 게 더 바람직 할 것이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을 정도다. “정치는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으며, 가장 문제가 많고, 가장 한심한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정치다. 문제는 이 ‘나쁜 정치’가 사회의 다른 섹터들, 가령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있으며 그곳에서 온갖 부패와 부정과 악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사이 대학로에서 공연되는 정치적 작품(공연)들은 대개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내용을 그저 각색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 소재나 내용들이야말로 핸드폰만 열면 줄줄이 보고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공연이 시대가 지나면 희곡의 가치를 잃을 형편에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핸드폰의 동영상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일부러 극장까지 보러갈 관객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그런 공연을 반기는 관객은 고작 같은 운동장에서 노는 정치적 동지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건, 이런 정치적 이슈들이 충분한 ‘숙성기간’을 갖지 못하고 발표되는 게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숙성 없는’ 날고기가 바로 요즘의 정치성 이념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외려 일제 강점기의 희곡이나 해방공간에서 쓰여 진 우리 희곡들이 무대에 오르는 국립극단의 ‘근대극시리즈’가 외려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도 연출가의 육성은 한국연극의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무시 못 할 일은, 잘못된 지원과 육성책으로 인해 연출가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점점 연출가를 위한 지원책이 허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작 연출가’만 존재할 뿐, 또 연출가가 있다고 해도 겨우 ‘목적극’이 전부여서 예술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건, 20세기 들어 나타난 연출가라는 역할(직업)이 현대연극에서 엄청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세계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에는 극단대표와 제작자를 겸하는 연출가들이 외려 극작가 위주의 지원정책으로 소외되고 있는 기현상을 연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연출가들마저도 희곡작가들을 통해서, 또는 극작을 겸하므로 해서 ‘지원금의 수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인 게 현실이다. 그런 형편이니 국립극단의 예술감독을 맡아줄 연출가를 찾기도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니 이런 한국연극계에서는 작, 연출이 성행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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