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연극’ 정착을 위한 제언/ 오세곤

*이 글은 5월 25일 여성연극협회 주최 포럼 ‘미투 이후’ 공연계, ‘공연 제작환경개선을 위한 진단과 전망에서 발표되었습니다.

 

‘공정연극’ 정착을 위한 제언

 

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연극은 협동예술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만든다는 의미의 ‘협동예술’은 여러 장르의 예술이 모여 하나를 이룬다는 의미의 ‘종합예술’과 함께 연극의 종합성을 이루는 표현이다.* 연극 작품에 포함된 각각의 부분이 모두 예술이어야 하듯이 연극 작품 창작에 참여하는 각각의 사람 역시 모두 예술가이어야 한다.

그 예술가들 사이에 위계(位階)와 권력(權力)은 존재하는가? 위계는 “지위나 계층 따위의 등급”이고, 권력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을 뜻한다. 즉 위계와 권력은 높낮이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높낮이를 인정하는 순간 ‘협동(協同)’이라는 단어는 무색해진다. ‘협동’에는 이미 동등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사실 예술 창조를 위하여 “서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합함”에 있어서 높고 낮음은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 창조란 최고의 가치를 지향한다 할 때 힘을 합하는 모두는 각자 예술가로서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고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물론 협동 과정에서 역할의 ‘다름’은 당연히 존재한다. 작가, 연출, 배우, 스태프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름을 높낮이와 혼동하는 일이 발생하기 쉽다. 특히 연극 창작 과정 중 흔히 접하게 되는 ‘지시(指示)’와 ‘지도(指導)’라는 표현은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이다. 지시에는 “가리켜 보임”과 함께 “일러서 시킴”이라는 뜻도 있고, 또 법률에서는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에” 내리는 규칙이라는 의미도 있다. 또 지도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남을 가르쳐 이끎”을 뜻한다.

작가는 대사와 지문, 해설을 통해 형상화의 길을 ‘지시’한다. 특히 지문(地文)과 해설(解說)은 지시문(指示文)으로 묶어 지칭하기도 한다. 그것을 통해 “몸짓이나 무대장치, 분위기 따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연출(演出)은 영문으로 ‘director’, 즉 ‘directoin(지시)’의 주체이다. 또 우리 사전에서도 연출의 뜻은 “연극이나 방송극 따위에서, 각본을 바탕으로 배우의 연기, 무대 장치, 의상, 조명, 분장 따위의 여러 부분을 종합적으로 지도하여 작품을 완성하는 일,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으로 아예 ‘지도’라는 단어를 포함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나 연출이 행하는 지시는 하달(下達)의 명령이 아니라 범위의 설정 내지 제한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세밀한 지시라 해도 그것의 실현은 배우들의 더욱 세밀한 구체적인 선택과 결정을 거쳐야 한다. 이 세밀함에는 한계가 없다. 한 치라도, 아니, 천분의, 만분의, 십만분의 한 치라도 더 세밀해지고자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가나 연출의 “천천히”라는 지시가 있다 할 때 그 실제 속도는 무한의 가능성 중에서 선택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연출이 연기 시범을 보인다 해도 배우에게 그것은 자신의 결정을 위한 참고사항일 뿐 결코 복제의 대상은 아니다.

연극 제작 과정에서 위계와 권력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건 역시 연출과 배우 관계에서이다. 물론 연출은 스태프에게도 상급의 권력자로 행세할 수 있다. 배우를 캐스팅하듯 스태프도 대개는 연출이 결정하고, 배우가 그렇듯 스태프도 연출의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개월 씩 매일 긴 시간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연습해야 하는 배우가 연출의 권력으로부터 더욱 커다란 압박감을 느낄 것은 당연하다.

흔히 캐스팅을 위한 오디션에 대해 몇 십 대 일이니, 몇 백 대 일이니 하며 경쟁률을 화제로 삼는다. 그 결정은 대개 연출이 한다. 그래서 연출은 선택하는 자요, 배우는 선택받는 자가 된다. 그러나 과연 일방적 선택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수치와 비율의 차이는 있지만 배우도 연출을 선택한다. 이 경우 기회의 희소성에서 비롯된 격차 때문에 일방향의 선택이라는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심지어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하는 그릇된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협동정신에 반하는 생각이야말로 연극 예술을 망치는 가장 심각한 저해 요소임을 명심해야 한다.

설령 일방의 선택으로 인정한다 해도 일단 상대를 결정하고 나면 완전히 새로운 창조의 장(場)이 펼쳐진다. 이전에 선택 목록에 있었던 대상은 이제 별 의미가 없고 지금 만나 나와 함께 있는 상대와 무엇이든 창조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상대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소모품 정도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협동이 가능할까? 협동이 없다면 어떻게 연극이 가능할까? 최종적으로 관객을 만나는 배우가 협동의 상대가 아닌 로봇처럼 연출의 지시에 머무는 존재라면 과연 그 예술적 수준은 어떨까? 연출의 지시를 지침으로 하되 그 범위 안에서 다시 세밀하게 구체화하는 마지막 창조 과정이 사라진 연극이 과연 높은 수준에 다다를 수 있을까?

예술가는 단 한 치라도 높은 수준에 이르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예술은 비효율적이다. 그 비효율을 지탱하는 것은 열정이다. 그런데 이 열정이 악용된다. 그 대표적 사례로 ‘열정페이’가 있지만, 그것 말고도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강요되는 부당한 인내와 희생은 수없이 많다. 열정페이조차 없는 무보수의 강요나 예술 창작과 무관한 일의 강요 등 각종 착취, 언어폭력과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폭력과 폭행, 협동 참여자로서의 자기 의견은커녕 최소한의 정당한 요구조차 꺼내기 어려운 강압의 분위기 등등.

한마디로 연극 제작 과정은 공정(公正)해야 한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뜻한다. 과정이 올바르지 않으면 예술의 가치는 손상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정신과 공정하지 않은 과정은 서로 맞지 않는다. 지난 2월 고등학교 연극 교과서 집필자들은 이윤택, 오태석 등의 작품을 삭제하기로 결정하여 발표하였다. 창작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작품을 교육의 내용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극 제작 과정의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평등의 원칙이다.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 존중하면서, 또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개진해 가며 만드는 것이 연극이다. 물론 절대 흐트러져서는 안 되는 각자의 임무와 그 범위가 있고, 또 책임과 권한도 있다. 그러나 평등하지 않은 위계와 권력은 자주 범위를 넘어 월권을 행하며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기도 한다.

연극 제작 현장에서 누구든 평등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은 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한 계몽과 교육이 필요하다. 현장 단체가 됐건 학교가 됐건 연극 작업에서 평등원칙의 실천 강령이 필요하다. 워낙 오랜 기간 뿌리박힌 폐습은 단번에 제거되지 않는다. 집단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평등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이 어떤 것인지 지속적으로 목록을 정리해 발표해야 한다. 극단이나 대학 전공학과에 자체적으로 평등원칙에 대해 판단하고 문제 발생 시 조처를 취하는 기구를 두는 것도 좋다. 물론 연극계 전체를 아우르는 기구도 가능하다면 설치하는 것이 좋다.

물론 선언이나 강령만으로 평등원칙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또 밀도 높은 예술 창작 현장에서 평등의 원칙이란 게 가당치 않다고 반론을 펴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등이 예술 창작의 밀도를 해친다는 것은 일종의 편견이다. 그것은 마치 담배가 없이는 원고를 못 쓴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담배와 원고는 오랜 습관으로 인한 착각일 뿐 당연히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숨 막히는 강압의 분위기가 예술의 질을 보장한다는 것도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다.

또 하나 연극 제작 과정의 공정을 해치는 것으로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 물론 연극 제작 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대가를 터무니없이 적게 책정하거나 아예 지불하지 않는 일을 타당화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2015년 1월 연극 현장에 적용 가능한 표준인건비를 연구해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러면서 십중팔구 적자가 예상되는 제작 여건에서 실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작품에 대한 지분을 계산하여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물론 실제 손에 쥐는 것이 없는 공허한 수치일 수도 있다. 또 예술적 행위가 돈으로 계산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연극인이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최소한 얼마의 대가로 환산되는지 따져보는 것은 대외적 인식은 물론 연극계 내 인식 전환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연극인 스스로도 눈에 보이는 물건은 돈 주고 사지만 열정과 노력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는 이상하리만치 인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배우에게 얼마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제작 여건상 능력이 안 돼서 주지 못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와 저 배우는 내가 뽑아주었기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있으니 내게 고마워해야 하고 그러니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할 때 전자가 앞서의 평등원칙과 부합할 가능성이 크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연극 제작 현장에 대해 ‘공정연극’을 제안한다. 함께 연극을 만드는 이들을 자신과 동등한 예술가로 인정하고 그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바로 자신이 참여하는 연극 작품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인식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래서 현장의 단체건 대학 전공학과이건 작업에 들어가기 전 일종의 실천 강령을 정해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시시각각 그것을 되뇌며 스스로를 점검하는 것이 좋겠다. 아울러 비록 일반적인 개념의 계약서와는 다르다 해도 세세하게 준수 내용까지 포함된 계약서 내지 협약서를 작성하는 것도 시도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비록 어색하고 어렵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연극 제작의 당연한 풍토로 자리 잡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제야말로 연극인들이 진취성을 발휘하여 예술계 전체에 모범을 제시할 때라고 생각하며 발표를 마친다.

 

 *종합성은 현장성, 이중성, 계획성과 함께 연극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

**2015년 기준이지만 일반공연에는 최저임금을 적용하고 비영리공연에는 최저생계비를 적용했을 때 배우 5명이 출연하는 연극의 표준인건비 합계는 일반공연이 약 6천 2백만 원이고 주로 동인제 극단에 해당하는 비영리공연은 약 3천 3백만 원이었다.(오세곤외. 공연예술전문인력 표준인건비 산출연구-연극분야 종사자를 중심으로-. 2015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일반 공연 1편당 분야별 예상 인건비>

분야 인건비
 배우 5인(평균 경력 10년, 평균 투여율 80%) 2099만 1960원
 연출(경력 10년) 699만 7320원
 극작가(경력 10년) 699만 7320원
 조연출(경력 5년) 437만 3325원
 무대감독(경력 5년) 437만 3325원
 드라마투르그(경력 10년, 투여율 60%) 209만 9196원
 기획(경력 5년, 투여율 100%) 291만 5550원
 디자이너 5인(평균 경력 10년, 평균 투여율 60%) 1049만 5980원
 셋팅 크루 3인(경력 기본, 1일 8시간 3일 24시간) 87만 4656원
 오퍼 2인(경력 기본, 연습 24시간, 공연 12회 36시간, 합계 60시간) 145만 7760원
 기획보조(경력 기본, 2주 48시간) 58만 3104원
 이상 인건비 합계  6215만 9496원

 

<비영리 공연 1편당 분야별 예상 인건비>

분야 인건비
 배우 5인(평균 경력 10년, 평균 투여율 80%) 1111만 1060원
 연출(경력 10년) 370만 3686원
 극작가(경력 10년) 370만 3686원
 조연출(경력 5년) 231만 4804원
 무대감독(경력 5년) 231만 4804원
 드라마투르그(경력 10년, 투여율 60%) 111만 1106원
 기획(경력 5년, 투여율 100%) 154만 3203원
 디자이너 5인(평균 경력 10년, 평균 투여율 60%) 555만 5529원
 셋팅 크루 3인(경력 기본, 1일 8시간 3일 24시간) 46만 2960원
 오퍼 2인(경력 기본, 연습 24시간, 공연 12회 36시간, 합계 60시간) 77만 1600원
 기획보조(경력 기본, 2주 48시간) 30만 8640원
 이상 인건비 합계  3290만 1078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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