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적 희곡 읽기 1] 베케트 작 <오 행복한 날들> / 오세곤

[3차원적 희곡 읽기 1]

베케트 작 <오 행복한 날들 Oh Les Beaux Jours>

 

오세곤

 

 

사무엘 베케트가 1961년 영어로 발표하고 1962년 불어로 번역 발표한 작품.

부인 위니와 남편 윌리 두 명만 등장한다. 그러나 부인 위니는 1막에서는 가슴까지, 2막에서는 목까지 파묻힌 상태이며, 남편 윌리는 위니가 묻힌 흙더미 뒤에 있으면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위니를 가두고 있는 흙더미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간의 상태를 추상화한 형상이리라는 추측은 쉬이 할 수 있다. 1막에서는 상체만 움직이면서, 2막에서는 간신히 눈동자만 돌릴 수 있는 상태에서도 위니는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고 기억하려고 한다. 그 내용은 대단히 일상적이다. 윌리 역시 간헐적이지만 다분히 일상적인 내용의 대사를 내뱉는다. <고도를 기다리며> 2막에서는 1막에는 없었던 나뭇잎이 몇 개 돋아나 있다. <오, 행복한 날들> 2막에서는 1막보다 더 깊이 위니를 파묻고 있는 흙더미가 등장한다. 얼핏 보기에 돋아난 나뭇잎은 희망으로 보이고 깊어진 흙더미는 절망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간을 벗어나지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인물이나 <오 행복한 날들>의 두 인물이나 모두 처음부터 그냥 그 공간에 그대로 있을 뿐이다. 물론 1막과 2막의 공간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 1막과 2막의 인물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조차 알 수 없기에 “그냥 그 공간에 그대로 있다”는 표현은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더 어려운 건 희망과 절망 중 어느 쪽인지 판단하는 일이다. 아니, 결정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베케트가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커다란 과제일 것이다.

 

 

단상 1-부조리 찬가

 

부조리극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 주지 않는다. 그 고민은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몫이다. 아니, 관객만이 아닌 배우와 연출까지도 그 고민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게 왜 하는지 모르면서 하는 일일 것이다. 숫제 “세상이 이러니까 이렇게 살아야지. 알겠어?” 하는 식이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건 아예 없다. 배우와 연출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세상은 이렇다”고 보여주는 일뿐이다. 그러니 관객들이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하고 물어도 대답할 수 없다. 배우와 연출 역시 답을 못 찾은 채 여전히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답을 찾았다 해도, 물론 대부분 찾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나의 답이 남의 답이 될 수 없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답을 줄 수 없다. 답답하다. 관객이나 배우와 연출이나 모두 답답하다.
답답한 것이 이 연극의 가장 확실한 특징이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1막에서 가슴까지 묻혀 있는 위니가 답답해 보인다. 그런데 2막에서는 목까지 묻혀 있다. 더 답답하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려고 한다. 쉬지 않고 생각하고 기억해 내려고 한다. 그리고는 “행복”을 외친다. 역설적이다. 하지만 역설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위니가 정말 행복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배우와 연출의 가장 큰 고민은 여기 있다. 위니를 맡은 배우가 행복하다고 느끼며 “행복”을 말할 건지 아니면 불행하다고 느끼며 “행복”을 말할 건지, 또 불행하다고 느낄 경우 절망스런 마음으로 “행복”을 말할 건지 아니면 스스로 자기 암시를 통해 행복해지려고 “행복”을 말할 건지 찾아내거나 결정해야 한다.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절망이나 희망 중 어느 쪽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 답답함은 감수한다고 하더라도 배우가 연기를 하는 데 있어서 말과 몸짓에 담기는 의미와 감정이 분명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연출하는 입장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추상과 구체의 조율이다. 현실적으로 시시각각 솟아나는 구체화의 욕구는 작품이 지닌 원초적 추상성과 크게 충돌한다. 이미 연습을 시작하고도 그 충돌은 계속된다.
아마 공연 직전까지도 구체화 욕구를 타당화하려는 방어 본능과 싸워야 할 것이다. 배우가 연기를 할 수 있는 구체성의 최저치를 어디로 잡을지, 관객들로 하여금 희망과 절망 중 결정할 권리와 책임을 오롯이 넘겨줄 수 있는 추상성의 최대치를 어떻게 상정할지 끝까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를 흉내 내 본다. “나는 고민한다. 고로 존재한다.” 아니다. “나는 고민한다. 고로 행복하다.”

 

 

단상 2-인간과 지능

 

인간은 지능이 있어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고 그래서 땅속 깊이 묻힌 화석을 파내 이리저리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으로 기관을 돌리고 전기를 생산하고 자동차를 굴리고 비행기를 날리고 배를 움직인다. 그에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 비닐을 만들고 플라스틱을 뽑아냈다. 그 결과 화석 연료는 대기를 오염시켰고 온실 가스는 지구를 덥혔다. 플라스틱은 땅과 바다를 뒤덮어 숨통을 틀어막고 잘게잘게 부서지며 종국에는 모든 생물 세포에 스며들 것이다.
쓰기 편하다고 쓰지만 그게 결국 우리의 무덤임을 모르는 것이다. 마치 원자력이 그런 것처럼.
사실 우라늄도 그냥 땅속에 놔둬야 하는 것이었다. 그걸 꺼낸 건 재앙을 초청한 것이다.

인간은 지능이 있기에 이 모든 게 필연일지도 모른다. 능력이 없으면 몰라도 있는 능력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사용할 능력만 있지 멈추고 자제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잘못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 한다.

결국 지능은 신이 인간에게 가한 형벌이다.

과학은 인간의 불행이다.

지금은 플라스틱 쓰레기에, 핵 쓰레기에 허리 정도까지만 묻혀 있지만 조만간 목까지 묻힐 것이고, 조만간 입까지, 코까지, 눈까지, 이마까지 묻힐 것이다.

물론 그때도 우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지능이 있음을 자랑하면서 “오, 행복한 날들이여!”를 외칠 것이다.

오, 인간 만세!

만물의 영장, 만만세!

 

 

단상 3-언어와 인간

 

언어는 인간만의 전유물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언어를 의미 전달 수단이라 한다면 침팬지도 그것을 갖고 있고 꿀벌도 그것을 사용한다. 그러나 인간 언어는 특별하다. 몇 개의 한정된 음소를 결합하여 음절을 만들고, 그것을 결합하여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든다. 음소는 한정돼 있지만 문장에 이르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것을 생산할 수 있으니 가히 무한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유한한 요소를 결합하여 무한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 언어뿐이다.

인간은 이러한 언어로 문명을 축적하였다. 대를 이어 축적된 문명은 계속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결국 인간은 언어로 해서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언어는 분명 인간에게 부여된 신의 축복임이 틀림없다. 인간이 오만해졌을 때 그것을 벌하는 방법으로 언어를 제각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보면 애당초 신의 축복이었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언어는 부정확하다. 경제 원칙 때문에 모든 것을 100% 완벽하게 구분하지 못 하도록 설계가 된다. 동음이의어와 이음동의어 같은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완벽을 꿈꾸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위 완전언어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지껏 성공한 사례가 없다. <오 행복한 날들>의 위니도 부단히 자신의 언어 표현을 보완한다. 그러나 늘 불만일 뿐이다. 완성됐나 싶으면 다시 부족한 것을 느낀다. 그래서 다시 또 고민을 시작한다. 부조리극은 거의 예외 없이 언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인간들은 세상이 조리 있다고 믿지만 실은 정반대라는 것을 입증하기에 아주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언어로 논리를 세운다. 그런데 그 언어가 부조리하다면, 즉 비논리적이라면 어찌 되는 것일까? 언어의 부조리함은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잘 안 보인다.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확연히 느껴진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 “다섯 시 십 분”이라는 표현이 있다 할 때 외국인들은 그것을 대단히 이상하게 느끼지만 한국인들은 그렇지 않다. 왜 “다섯 시 열 분”이나 “오 시 십 분”이 아니고 꼭 “다섯 시 십 분”으로 말해야 하는지 물어도 선뜻 이해하지 못 한다. 왜 “일이삼사오”와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라는 두 가지의 수 표현법이 있으며 왜 시간을 말할 때 그것 중 한 쪽으로 쓰지 않고 “시”에는 “다섯”을 붙이고, “분”에는 “십”을 붙이는지 설명해 달라 하면 난감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프랑스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들이 거의 외국인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베케트는 아일랜드 사람이고, 이오네스코는 루마니아 사람이다. 또 아라발은 스페인 사람이고, 아다모프는 러시아 사람이다. 물론 주네는 프랑스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백인이 아닌 흑인, 얼굴이 하얗거나 붉은 흑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철저한 주변인이었다. 즉 외국인이나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모든 일들에 대해 거리두기가 이루어지는 사람이었다.
이제 언어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한다. 언어는 과연 신의 은총일까? 언어가 없었더라면 더 완벽한 의미 전달 수단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아니, 이미 있는 능력이 언어로 해서 막혀 버린 것은 아닐까? 신의 은총이 아니라 신의 저주가 아닐까? 아니면 인간의 오만을 방지하기 위한 신의 경계가 아닐까? 깊이 고민해 볼 일이다.

 

 

단상 4-희극과 비극

 

위니는 땅에 묻혀 있다. 1막에서는 허리까지, 2막에서는 목까지 묻혀 있다. 남편 윌리는 그 뒤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지나가던, 또는 길을 잘못 들어 위니를 발견한(물론 직접 등장 않고 위니의 대사로만 드러나는) 남녀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본다. 그리고는 묻는다. 도대체 저 여자는 왜 저러고 있는가? 여자가 저 모양인데 왜 남자는 파내 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가? 아마도 <오 행복한 날들>의 관객들 역시 지나가던, 또는 길을 잘못 든 남녀와 똑같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무엇엔가 의문이 생기는 건 그것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건 그것이 자신과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건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상이 아닌 것을 보며 웃도록 하는 연극을 희극이라고 한다. 특히 무대 위의 인물들이 비정상이어서 정상인 자신보다 무척 모자라다고 생각할 때 관객들은 웃는다. 또는 왜 정상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비웃는다.

그런데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그러니까 0.01%라도, 아니, 그보다 더 낮은 확률이라도 내가 위니라면, 내가 윌리라면, 내가 위니와 같은 처지라면, 내가 윌리와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더욱이 난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들을 보며 마구 웃었다면,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결국 나의 모습을 보고 웃은 거라면, 결국 나의 처지를 보며 비웃은 거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웃은 만큼, 비웃은 만큼 비극이 되는 것이 아닐까?

태어나 단 한 번도 거울을 못 본 사람이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이 뭔지 모르는 그 사람 눈에 뭔가가 보인다. 대단히 기괴한 모습이다. 자신도 모르게 비웃는다. 심지어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죽지 않고 사느냐고 마구 손가락질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자꾸 자신을 따라하는 것 같다. 점점 의문이 든다. 뭐지? 누구지? 그러다 마침내 알게 된다. 그것이 자기의 모습임을. 충격이다. 이제 어쩐단 말인가? 저런 모습이면 자살할 거라고 큰 소리 쳤는데. 아, 비극이다. 비극. 비웃은 만큼, 아니 그 몇 곱절의 비극이 되고 만다.

그러나 위니가 자신이고 윌리가 자신임을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계속 위니와 윌리를 비웃으며, 불행한 그들에 비해 자신은 참으로 행복하다 여기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스스로 인정하기에는 너무 참담한 모습이기에 거울의 존재가 명확해진 이후에도 그것을 애써 부정하는 이들 또한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일부만이 그것이 자신의 얼굴임을 인정하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몰라서 행복한 사람들과 알지만 부정하는 사람들과 알아서 괴로운 사람 중 어느 부류에 속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선택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알고 나서 부정할지 인정할지는 선택이겠지만 깨닫고 못 깨닫고는 선택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러한 깨달음은 우연히 갑자기 툭 하고 다가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우연은 과연 행운일까 불행일까? 모르겠다. 의지대로 안 되는 그 우연을 원할 건지 원하지 않을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깊이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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