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을 지배하라

연극 <이방인>

 

글_백승무(연극평론가)

 

원작   알베르 카뮈
연출/각색   나진환
극단   극단 피악
장소   동양예술극장
일시   2019년 8월 20일~31일
관극일시   2019 8년 23일 20시

 

 

도식적으로 말해 템포는 빠르기이고, 리듬은 좀 더 포괄적 의미의 음악적 흐름, 즉 고저-장단-강약-완급의 조절을 통해 긴장-이완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템포-리듬은 연출과 배우가 표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무대 요소이다.

 

 

“삶이 있는 곳에 행동이 있고, 행동이 있는 곳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곳에 템포가, 템포가 있는 곳에 리듬이 있다.”(스타니슬랍스키). 이 리듬을 어떻게 통제·조절하느냐가 관객의 감동·감정을 좌우한다. 그래서 하나의 공연은 템포-리듬이 이어지는 한편의 교향악이다.

 

 

템포-리듬은 관객의 심리적 장벽(타인의 감정에 대한 자연스러운 거부·저항)을 붕괴시키는 최적의 방법론이다. 긴장(A)과 이완(B)이 규칙적으로 반복될 때, 긴장의 강도는 뒤로 갈수록 더 커진다. 즉 A – B ⇒ A’ – B’ ⇒ A” – B”로 긴장·이완이 반복될 때 A”의 긴장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이 긴장도를 유지→누적→점층→폭발시키는 능력이 연출술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원리가 바로 템포-리듬이다.

 

 

배우가 울고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된다고 관객이 손수건을 꺼내진 않는다. 가슴 미어지는 스토리가 진행된다고 관객이 공명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내용적 요소는 그 자체로는 큰 영향력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 내면에서 그 내용적 요소의 폭발이 발생하도록 유도하는 기법이다.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고 내용적 요소를 100% 이상 흡수하게 만드는 것은 공연의 형식적 요소인 템포-리듬에 의해서이다.

 

 

적절한 템포-리듬을 이용해야 객석으로 감정이 전달된다. 템포-리듬이 미약하면 공연에 빨려들지 않는다.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원-투, 원-투, 리듬이 생성돼야 관객들의 굳은 감정이 유들유들하게 변한다. 물론 관객의 딱딱한 마음을 흔들면서 점차 공연의 리듬에 휩쓸리게 하는 테크닉(형식)은 내용적 요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형식과 내용의 분리불가능성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흔히 연기가 서툴거나 과잉감정에 빠질 때 객석에 감정이 전달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객석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전적으로 배우의 연기력에 달려있다고 오해한 결과다. 감동의 요체는 배우의 연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연출의 템포-리듬 능력에 있다. 최근 관람작 중 이 템포-리듬에 실패한 대표적 공연이 <그을린 사랑>이었다. 휑한 무대에 배우 연기점이 중앙에 몰리다보니 등퇴장에 3-4초를 빼앗긴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은 공연의 리듬감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게다가 극작가가 섬세하게 배치한 서정적 장면은 그저 무덤덤하게 ‘낭독’될 뿐이었다. 서사적 장면을 쫓기에 급급한 연출은 이 아름다운 희곡의 절반을 망가뜨리고 말았다. 연출은 큰 몫을 차지하는 그 서정적 장면들의 의미도, 역할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템포-리듬은 주저 앉을 수밖에.

 

 

문제는 이런 템포-리듬은 (관객이) 알아차리기도 힘들고 (연출이) 표현하기도 힘들며, (평론가가) 설명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서양)연극은 이런 템포-리듬에서 탄생한 예술이며, 2,500년간 이런 템포-리듬에 대한 본능적 감각을 유지/계승하면서 이어져왔다. 좋은 희곡 속에는 이 템포-리듬에 대한 배려/안배가 필수적이었고, 좋은 공연은 이 템포-리듬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지닌 연출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4년간 러시아에서 공연을 보면서 깨우친 진리는 그러했다. ‘템포-리듬을 지배한 자, 연극을 지배한다.’

 

 

한국 돌아와서 놀란 점은 그 템포-리듬이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 공연에서 그런 음악적 감각을 뽐내는 경우는 있었지만, 과반 이상의 공연은 실망스러웠다. 연출가들은 템포-리듬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었다. 대사를 이어붙이고 연출적 의도를 구겨넣는 데 급급했다. “연출술의 어려움은 연출가가 무엇보다도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연출가는 항상 대위법적으로 무대 움직임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메이예르홀트).

 

 

<이방인>(나진환 연출)은 템포-리듬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공연이다. 템포-리듬의 조정술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일일이 나열하기는 힘들지만, 배우의 한 동작을 예로 들자면, 뫼르소가 앉아서 무릎을 펴는 동작과 그 후 상체를 세우는 동작의 속도가 다른 장면이 있다. 하나의 순차적 행위에 시차를 둔 것이다. 당김음의 느낌이 나는 이 ‘일어서기’의 템포가 표정, 제스처, 동작, 움직임, 화술 등에서 반복되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리듬감을 느끼고, 그것은 인물의 라이트모티프가 된다. 한 배우의 템포-리듬은 다른 배우의 그것과 순응-충돌-변주되면서 미장센을 그린다. 배우의 음악성이 장면의 음악성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배우연기는 멜로디고, 미장센은 하모니다.”(메이예르홀트). 그리고 하모니의 진행방식은 공연의 대위법으로 진화한다.

 

 

<이방인>은 수학이다: 템포-리듬은 정확하게 계산된 동작과 그 동작의 유연성을 통해서도 감지된다. 코러스의 움직임과 좌우 크로싱, 등퇴장, 소품 이동 등은 속도, 빈도에 있어서 엄격함과 정확함을 유지한다. 수학 문제풀이처럼 정확한 수치가 딱 떨어질 때, 즉 하나의 행위가 시작과 끝의 단위로 정리될 때 그것은 악보 소절의 종료처럼 지각된다. 이런 행위 ‘단위’는 리듬감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이방인>은 과학이다: 기승전결의 구조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신경생리적 설정, 내용과 형식의 미적 융화가 주는 심리학적 영향, 행위의 인지적 작용-반작용에 토대한 물리역학적 법칙 등 <이방인>은 다양한 과학적 상식에 기반한 템포-리듬을 만들어낸다. 템포-리듬은 많은 연구와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방인>은 체육이다: 절도와 정확성이 있는 움직임은 그 자체로 리듬이다. 누울 때, 앉을 때, 설 때 배우들의 어깨 라인과 소품라인이 형성하는 수평-수직적 리듬을 보라. 엄격한 미장센의 준수 및 변칙이 유발하는 기하학적 무늬를 보라. 이런 미장센은 부분들의 하모니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방인>은 미술이다: 기본적으로 유채색과 무채색(흰색)의 이원적 대결이다. 형(形)은 사각형과 육면체의 닫힌/갇힌 세계. 이 색과 형의 심미적 구성이 대위법적으로 반복-변주된다. 백, 적, 황의 제한된 조명은 각각 빨간 원피스, 빨간 피, 자극적 태양, 모래빛, 그리고 위선의 백색을 상징한다. 위의 금언을 패러디하자면, ‘형과 색은 멜로디고, 미장센은 하모니다.’ 특히 하얀 무대 위의 빨간색 운동은 3박자 왈츠를 떠올린다.

 

 

음악 유감: 나진환 연출은 귀에 익은 음악을 애용한다. 세련된 미장센과 음악적 통속성은 좀 낯선 조합이다. 익숙한 음악이 주는 정서적 연상 효과도 인정하지만, 가사가 있는 음악은 그리 사려 깊은 선택은 아닌 듯하다. 차라리 둔탁하고 거슬리는 (가사 없는) 불협화음이 어땠을까.

 

 

뫼르소 유감: 아마 이 지점이 가장 큰 논쟁점일 듯한데, 뫼르소가 너무나 단조롭다. 어조와 표정을 단일 톤으로 덮어버렸다. 그의 무기력, 권태, 짜증, 무덤덤은 알겠다. 하지만 무기력조차도 연극적 무기력으로 번역되어 표현되어야 하지 않을까. 갈등·고뇌·저항·절규 없는 투명한 뫼르소를 보는 것은 그리 흥미롭지 않다.

 

 

나진환 유감: 이렇게 재능있는 연출이 대학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배고픈 야생에서 지원금에 목을 걸고 매년 서너 작품을 올리라고 요구하는 것, 정규수입도, 연금도 없이 최저생계자가 되어 적자를 각오하고 작품을 올리라고 요구하는 것, 그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확실한 건 생전에 이런 명품 <이방인>을 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리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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