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서늘하게

쇼트 쇼트 스토리

글_고수진

 

 

8월, 재빨리 더위를 식히고 싶을 땐 냉동실에서 사각 얼음을 꺼내 입속에 넣는다. 얼음이 녹는 짧은 순간 동안 머리끝은 쭈뼛 서고 등줄기는 서늘해진다. 두꺼운 책이 버거워지는 이 여름에 각얼음처럼 작지만 시원한 이야기를 찾는다면 호시 신이치의 쇼트 쇼트 스토리가 제격이다.

 

손바닥만 한 소설 쇼트 쇼트

 

호시 신이치(星新一 1926~1997) (출처: https://www.hoshishinichi.com/list/gallery16.html)

 

쇼트 쇼트(short short)는 400자 원고지 10매 안팎의 짧은 이야기로 손바닥 장(掌)자를 쓰는 장편(掌篇)소설에 해당한다. ‘쇼트 쇼트의 개척자’, ‘쇼트 쇼트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호시 신이치는 1926년 도쿄에서 호시제약 창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조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할아버지는 인류학자로 도쿄대학의 명예교수였으며 할머니는 일본의 문호로 불리는 모리 오가이의 여동생이었다.

1950년 도쿄대학 대학원 농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제약회사를 물려받은 신이치는 부친의 사망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회사를 정리하고 1957년 SF동인지 〈우주진〉의 창간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SF작가로 데뷔했다.

 

<우주진> 5월창간호와 6월호, 호시 신이치의 데뷔작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http://blog.livedoor.jp/jigokuan/archives/51627879.html)

 

여러 작가들이 장편(掌篇)소설을 썼음에도 유독 호시 신이치를 쇼트 쇼트의 개척자로 칭하는 이유는 그가 매달 70매 정도를 목표로 일생 동안 1000편이 넘는 작품을 꾸준히 써 온데다가 SF, 우화, 기담, 괴담 등을 아우르는 과감한 아이디어와 인간 본성을 꿰뚫는 냉철한 시각, 특유의 반전이 있는 스토리로 독자들을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상용한자만으로 이루어진 쉬운 문장과 ‘시사’, ‘고유명사’, ‘성과 폭력의 묘사’ 등을 철저히 배제한 내용으로 나이와 성별, 국적, 그리고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봇코짱> (출처:교보문고)

 

봇코짱은 겉보기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미인이지만 머리는 텅 비어 있는 로봇이다.

Bar에 오는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녀는 간단한 질문에 대답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동작 정도 밖에 하지 못한다.

게다가 마신 술은 다리로 연결된 튜브를 통해 발아래 통으로 모이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손님들은 그녀가 로봇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말수가 적고 도도한 그녀를 보러 술집으로 몰려들었다.

봇코짱 덕분에 장사가 번창하자 Bar의 마스터는

봇코짱의 발밑으로 흘러나온 술을 손님들에게 선심 쓰듯 나눠주곤 했다.

어느 날 봇코짱에게 반해 Bar를 드나들다 크게 외상을 진 청년이

다시는 술집 출입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꾸지람에 못 이겨 술값을 갚으러 온다.

, 이제 더 이상 못 와.”

못 온다고요?”

슬퍼?”

슬퍼요

사실은 그렇지 않지?”

사실은 그래요.”

너만큼 차가운 사람은 없을 거야.”

당신만큼 차가운 사람도 없을 거예요.”

죽여줄까?”

죽여줘요

청년은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봇코짱의 술잔에 타서 내민다.

마실래?”

마실게요.”

청년이 보는 앞에서 봇코짱은 잔을 비운다.

청년이 돈을 지불하고 나간 후 마스터는 선심 쓰듯 손님들에게 말한다.

지금부터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술은 봇코짱의 플라스틱 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날 밤 Bar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봇코짱은 누가 말을 걸어줄까 하고 새침한 표정을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봇코짱>은 단순한 로봇의 행동에 인간의 착각이 더해져 결국 파국을 맞는 이야기를 가볍고 단순한 문장 속에 녹여낸 작품으로 한국어, 영어 등 총 2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봇코짱> (출처: https://shinichihoshi.com/other_languages.html)

 

<나는 살인자입니다.>

호시 신이치의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연극 등으로 꾸준히 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국립극단의 ‘젊은연출가전’에서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 연출에 의해 연극으로 상연되었다.

 

(출처:국립극단)

 

신이치의 쇼트 쇼트작품 여섯 개를 옴니버스 형태로 만든 공연 <나는 살인자입니다>는 작품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반전에서 무릎을 치는 원작소설과 달리, 쇼트 쇼트의 시각적 구현에 연출의 방점을 두었다. 거울로 이루어진 무대, 암전과 조명의 활용, 카메라와 스크린을 사용한 공간의 확장 등 평면적인 무대에서 구현하기 힘든 SF적 상상력을 다양한 빛과 배우들의 움직임을 통해 무대화해 냄으로써 제54회 동아연극상에서 연출상, 무대예술상(조명), 연기상 등 3개 부분을 수상했다. 또, 2019년 국립극단에서의 재공연을 거쳐 그해 5월에는 일본 도쿄예술극장에도 초청되어 큰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19년 재공연 포스터와 도쿄예술극장 공연 포스터 (출처: https://www.ajunews.com/view/20190531151356101)

 

여섯 개의 에피소드는 ‘봇코짱’을 비롯해. ‘아는 사람’, ‘이봐 나와!’, ‘거울’, ‘우주의 남자들’, ‘장치 한 대’로 2019년 공연에서는 유병훈, 안병식, 김명기, 이봉련, 권일, 김정민, 박희정 등 일곱 명의 배우들이 역할을 바꿔가며 열연을 펼쳤다.

 

미모의 로봇 봇코짱의 이야기 ‘봇코짱’ (출처:국립극단)

 

회삿돈을 횡령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청년이 결국엔 모두에게 잊혀지게 된다는 ‘아는 사람’ (출처:국립극단)

 

거울에서 나온 악마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거울’ (출처:국립극단)

 

정체불명의 구멍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이봐, 나와!’ (출처:국립극단)

 

지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끝없는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주의 남자들’ (출처:국립극단)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계를 통해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장치 한 대’ (출처:국립극단)

 

호시 신이치는 1968년 <망상은행> 등의 작품으로 제21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1979년부터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 쇼트 콘테스트’라는 경연대회를 통해 신진 작가 발굴과 쇼트 쇼트의 확산에 힘썼다. 1997년 71세로 사망한 후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SF 대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1998년에는 생전에 집필한 쇼트 쇼트 작품 전체를 망라한 《호시 신이치 쇼트 쇼트 1001》이 간행되었다.

 

(출처:교보문고)

 

그는 만년에도 신규 독자를 배려하여 ‘다이얼을 돌렸다’를 ‘전화를 걸었다’로 고치는 등 시대에 맞지 않는 표현을 계속해서 수정했다고 한다. 호시 신이치의 작품들이 현재에도 크게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앞서가는 혜안에 더해 이런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SF작가보다 ‘우화작가’로 불리기를 바랐으며 ‘미래의 이솝’을 자처하기도 했던 호시 신이치,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현재 절판된 상태지만 도서관에서는 언제든지 기발한 그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로 먼 곳으로 떠나기 어려운 요즘, 도서관에서 쇼트쇼트를 읽으며 우주로, 미래로 짧은 피서를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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