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연극

연극 <웃기는 어둠>

글_손서영

원작 볼프람 로츠(Wolfram Lotz)

번역/연출 이은기

주최/기획 이은기

장소 대학로 드림시어터

일시 2020.10.08 ~ 2020.10.18.

(사진 제공: Copyrightⓒ 보통사진관_김솔)

믿을 수 있는 것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그리고 둘을 섞은 혼합현실. 뉴스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자랑스러운 산물이다. 현대 인류는 기술 발달을 통해 현실이 아닌 현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빛나는 발전 뒤엔 항상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과연 이 발전의 끝은 밝은 미래인가, 퇴보와 몰락인가? 이러한 기술로 이뤄진 세상은 과연 ‘진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직 그 누구도 기술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인류는 이전부터 많은 것을 상반되는 양극단으로 나눠 정의해왔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같은 근원적 개념의 구분을 넘어 문명과 미개, 발전과 도태처럼 세계의 구분을 이룩했다. 인류의 구분과 경계는 세계를 이분한 플라톤의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말한 ‘이데아’는 절대 진리, 본질, 눈으로 보이지 않는 실재이며, 인간이 온몸을 통해 감각할 수 있는 지금 여기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과는 구분된다. 그는 감각의 세계에서 실재라고 알고 믿는 것은 이데아 뒤로 지는 그림자일 뿐이며 실재는 따로 있다, 착각에서 벗어나 보이는 것을 회의하며 이데아를 마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극 <웃기는 어둠>은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현실의 이면, 즉 부조리를 고발하면서 실재, 진리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의 구분과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정된 사고 관념에서 탈출하도록 유도한다. 연극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이 허구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가볍게 봐서는 물음표만 안고 갈 연극이다. 그러나 그 고뇌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충분히 의미 있다.

(사진 제공: Copyrightⓒ 보통사진관_김솔)

혼란하고, 웃기고, 불편한 어둠 속으로

<웃기는 어둠>은 제목부터 모순적이다. ‘웃음’의 반대는 ‘슬픔’, ‘어둠’의 반대는 ‘빛’이므로 어쩌면 모순 관계로 설명하기도 애매한,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제목은 연극 내용을 정확히 반영한다. 연극에서는 여러 개의 심오한 키워드가 난무한다. 선진국과 후진국, 다국적 기업과 발전, 전쟁과 테러, 종교 분쟁, 생명 윤리 등등. 또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지난 2011년 ‘삼호 주얼리호’ 피랍 사건으로 재판에 선 소말리아 해적, 동료를 죽인 중령을 찾아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 밀림 속 힌두쿠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특수부대 상사와 탈북민 하사, 두 군인이 만나는 일본군과 현지 방문판매인과 기독교 선교자, 실종되었던 중령, 그리고 2020년 현재의 <웃기는 어둠> 작가까지.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연극 속에서 뒤엉킨다. 그렇다고 극이 진행되는 내내 진지하기만 하지는 않다. 배우들의 익살스럽고 뻔뻔한 자태에 웃음이 나기도, 흡입력 있는 연기와 몰입감에 안타까움이 들기도, 동공이 흔들릴 정도의 혼란을 겪기도 하며 관객은 90분의 공연 시간 동안 다이내믹한 감정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연극 <웃기는 어둠>은 ‘대학로 드림시어터’에서 공연된다.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은 작다. 무대는 단차도 없는 맨바닥이고, 그나마 좌석이 계단식으로 이루어져 관객과 배우를 나누어주는 무대를 겨우 인식해낼 수 있다. 그러나 극장 내부가 바닥, 무대, 천장 나눌 것 없이 온통 까맣게 칠해져 있어 ‘어둠’ 안에 갇힌 것처럼 뚜렷한 구분이 불가한 상황이 조성된다. 무대 장치는 간결하지만 충분히 활용된다. 극 진행에 도움을 주는 소품을 제외하고는 무대를 반원 모양으로 둘러싼 수많은 검은 끈과 속이 빈 직사각형 모양의 검은 프레임 네 개뿐이다.

(사진 제공: Copyrightⓒ 보통사진관_김솔)

공간의 경계, 그리고 현실과 허구

<웃기는 어둠>의 독특한 점은 무대 공간의 경계가 자유롭게 변형되는 것이다. 연극이 시작하기 10분 전부터 소말리아 해적 역의 배우가 나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다. 그는 감정 잡는 배우가 아니다. 분명 낯선 이국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움츠러든 모습의 소말리아 해적이다. 연극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관객을 첫 번째 장면의 무대 배경인 재판장으로 불러들인다. 상사와 하사의 밀림 항해 여정이 담긴 두 번째 장면을 중지한 2020년의 작가는 오른쪽 무대의 검은 끈, 즉 무대 경계가 사라진 무대 뒤편에서 휴대폰 녹음 기능으로 일기를 쓴다. 갑자기 무대 공간과 배우는 사라지고 작가와 관객이 공존하는 극 밖의 차원, 2020년 현재의 공간이 극장을 지배한다. 그 뒤로도 공간은 계속 변형된다. 다시 무대로 돌아가 두 군인이 중령을 만나 극을 진행하다가도, 이미 검은 끈이 일부 사라져 완전한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 중령은 작가가, 하사는 원래 극본에 없었지만 첨가된 여자 등장인물이 되어 무대는 다시 현재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그들을 떠난 상사가 어둠이 이제는 웃긴다고 느낄 때쯤 소말리아 해적을 만나고 두 인물의 공간이 혼재하며 극은 막을 내린다. 이처럼 연극은 무대장치의 변형을 가해 공간의 재설정함으로써 관객을 극중 공간에 참여시켰다 배제했다 하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 작업은 결과적으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문다. 현실의 어두운 면을 연극이라는 허구로 표현하지만 관객에게 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여 주제 의식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주목할 만한 점은 ‘소리의 활용’이다. 오디오 극본인 원작, 볼프람 로츠 작가의 <웃기는 어둠>에 걸맞게 적절한 음악을 통해 작은 극장의 공간을 확장한다. 실감 나는 효과음은 작고 어두운 공간에 상상으로 배경을 덧그리게 한다. 검은 프레임의 움직임에 소말리아 뱃고동 소리를 입혀 소말리아 영해를, 선교자의 설교 뒤 댄스곡을 틀어 신나게 춤을 추는 나체의 원주민들을 그린다. 연극의 특징인 공간의 도약 또한 소리로 이뤄진다. 두 군인의 장면에서 작가의 장면으로의 전환은 연극에서 핵심적인데, 컴퓨터 프로그램 ‘Microsoft Window XP’ 종료 소리를 통해 관객이 상징적으로 시공간 및 차원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정된 공간 속의 다양한 장면 연출을 위한 고심이 드러나는 창의적이고 새로운 시도다.

(사진 제공: Copyrightⓒ 보통사진관_김솔)

예측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일

혼돈을 야기하는 연극의 플롯 구조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이면에 대한 고발과 풍자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어 연극은 여전히 흥미롭다. 내용의 측면에서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인물 설정을 통해 문명의 불편한 현실을 허구와 섞어 표현하나 결국 그것이 현실임을 암시한다. 다국적 기업의 원주민 노동자가 미개하다며 온갖 야만적인 말을 내뱉는 일본군, 테러로 가족이 죽은 일이 자신이 차양을 설치한 탓이라며 슬픈 표정으로 물건을 파는 현지 방문판매인, 이슬람교 원주민들을 선교하려 드는 기독교 목사, 더 적은 사람의 사망을 위해 적군 24명 대신 동료 2명을 사살한 중령. 이 모든 인물은 작가를 맡은 배우가 소화한다. 감쪽같은 일인다역으로 그의 연기가 감탄스럽다가도, 인물이 모두 현실의 작가와 연결되며 문명과 발전의 이면과 부조리에 거북함을 느끼게 된다.

연극은 상사의 독백과 상황을 오래 노출하며 관객이 그에게 이입하도록 한다. 냉소적 현대인의 상징인 상사가 문명과 멀지만 동시에 문명의 어둠을 낱낱이 드러내는 밀림의 광기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은 공감을 부른다. 작품의 경계를 넘나드는 하사와 작가(혹은 중령)를 이해하지 못하며 어둠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관객의 모습을 대변하기도 한다. 극의 말미에서 상사는 극에서 이미 맡은 바를 다한 소말리아 해적이 검은 끈을 비집고 뛰쳐나와 관객에게 자신의 상황을 호소하자 갑자기 총을 쏜다. 연극은 상사를 통해 부조리를 인지하지만 무시하는 문명인, 세계는 물론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부조리조차도 막을 수 없는 인간과 문명의 비논리적 면모를 드러낸다. 정말 ‘웃기는 어둠’이다. 인류가 옳다고 쌓아온 정의와 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가치 판단을 뒤엎으며 연극은 혼돈을 선사한다.

(사진 제공: Copyrightⓒ 보통사진관_김솔)

경계를 허무는 연극

“예측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일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기를. 특히 여기에서는 뭔가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연극이 시작함을 알리는 안내방송에서도, 연극이 끝나가는 와중에도 이 대사를 반복한다. 그러나 <웃기는 어둠>은 모순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문명과 현대 문명인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비꼬고, 온전하다 믿었던 현실의 결함을 지적하며 아무것도 믿고 싶지 않게 만든다. 이에 대한 불쾌함과 경계의 파괴로 정리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선사하는 연극으로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그러나 분명 연극은 부조리를 인지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움을 감내할 가치가 있다. 그 대가는 불편한 감정의 축적과 뒤이어 싹트는 개선의 의지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구분과 경계 너머의 ‘웃기는 어둠’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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