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는 희극은 웃음이 된다

연극 <스카팽>

공진우

원작 몰리에르

각색/연출 임도완

제작 국립극단

장소 명동예술극장

일시 2020.10.14. ~ 2020.11.15.

(사진제공:국립극단)

웃음우스움사이

세상에 웃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때로 우리는 그저 웃기 위해 예능이나 개그 프로그램을 보거나, 극장에서 코미디물을 찾기도 한다. 갈수록 바빠지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 ‘웃음’은 그 자체로 삶이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이다. 연극에서 역시 웃음은 중요하다. 특히 희곡이라는 장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스꽝스럽지 않게 웃기기는 쉽지 않다. 우스운 사람의 말은 쉽게 잊히지만, 웃긴 사람의 말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법이다. 우리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웃으며, 연극이 끝나면 웃음의 기억을 따라 다시 한번 극을 회상하게 된다. 관객에게 웃음을 주면서도 우습지 않은 연기는 이 지점에서 중요하다. 작가가 관객에게 주고자 하는 희곡의 주제의식은 대개 웃음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스카팽의 간계>, 그리고 <스카팽>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몰리에르는 극작가이면서 연출가이며 배우였다. 그의 <타르튀프>, <돈 쥐앙>, <스카팽의 간계> 등의 다양한 작품은 단순한 웃음을 넘어 인간 본성을 본질적으로 파헤쳐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신랄한 풍자를 통해 권위주의에 냉소를 던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중 임도완 연출이 각색한 <스카팽>의 원작 <스카팽의 간계>는 1671년 초연된 작품으로 비상한 머리를 지닌 하인 ‘스카팽’의 꾀를 통해 지배계층의 편견과 탐욕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몰리에르는 17세기 프랑스 상류사회에 퍼져있던 부패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적인 태도로 바라보며, 다양한 작품을 통해 귀족사회를 아둔하고 과장되게 묘사함으로써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연극 <스카팽>의 큰 틀의 내용은 원작과 같다. 극 속에서 부잣집 도련님인 ‘옥따브’와 ‘레앙드르’는 서로 절친한 사이이며, 각자 사모하는 연인이 있다. 그러나 옥따브는 정략결혼의 대상이 있고, 레앙드르의 연인 제르비네뜨는 신분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사랑이 위협받게 되자 옥따브와 레앙드르는 스카팽에게 그들의 부모를 꾀어달라고 간청한다. 옥따브와 레앙드르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서 스카팽은 그들의 부모인 아르강뜨와 제롱뜨를 꾀를 내어 속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하인에 불과한 스카팽에게 매달리는 옥따브와 레앙드르의 모습과, 스카팽의 꾀에 속아 넘어가는 그들의 부모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폭소를 자아내며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결국 고전희곡 답게 마무리는 이아상뜨와 제르비네뜨가 각자 제롱뜨와 아르강뜨의 딸이라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옥따브와 레앙드르와 결혼하게 되고, 스카팽 역시 아르강뜨와 제롱뜨를 골탕 먹인 죄를 용서받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사진제공:국립극단)

극의 전반적인 스토리 자체는 원작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스카팽>은 연출적인 측면에서 여러 변화를 주었다. 우선 작품의 원작가인 몰리에르를 연극에 등장시켰다. 몰리에르는 처음 극이 올라가기 전, 작품에 대한 배경설명을 하고 연극의 중간중간 독백으로 사회를 풍자하며 관객들과 소통하며 무대와 관객석 사이에 앉아서 배우들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기도 한다. 이 몰리에르의 역할로 인해 <스카팽>은 ‘메타극’의 형태를 띠게 되는데, 이는 관객에게 ‘연극을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환기시켜 희극이 가지고 있는 놀이성 자체를 극대화한다. 몰리에르가 첫 등장에서 대사를 잊어버린 배우에게 대사를 알려주는 장면과, 극 중에 등장하여 원작을 각색하다 보니 희곡 자체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배우들에게 ‘연결해’라고 말하며 번번이 떠나는 장면들이 그렇다.

또한 원작이 코메디아 델라르테, 즉 배우들의 즉흥적인 연기가 부각되는 연극인 만큼 <스카팽> 역시 배우들의 여러 재간이 두드러진다. 멀리서 의자를 밀면 발로 세우고 몸을 던지면 받아주고 멀리서 돈주머니를 던져도 주머니 속으로 척하고 빨려 들어가는 등의 배우들의 호흡이나, 때로는 뮤지컬처럼 노래를 부르거나 랩으로 대사를 하는 극의 다양한 연출은 관객들에게 쉴새 없이 여러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리고 자칫 평면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배역들의 개성을 잘 살려서 웃기지만 우습지는 않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탄생하게 된다. 음향 감독이 무대 아래편에 위치해서 배우들의 발걸음이나 과장된 몸짓 등의 다양한 음향효과를 제공하는 것도 신선한 연출이었다. 시각적인 볼거리와 청각적인 효과가 결합하면서 극의 유희성은 한층 강화된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원작 <스카팽의 간계>는 조선시대의 ‘양반극‘과 유사한 점이 많다. 양반극 역시 17세기 중엽부터 흥행하기 시작했으며, 재치 있는 하인이 우둔한 주인을 꾀로 골탕 먹인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분노를 놀이나 연극의 형태로서 지배계층의 타락과 탐욕을 풍자해냄으로써 조금이나마 풀어왔다. 비록 과거보다 미약할지라도 돈을 만능시하고 사회적으로 ‘갑질’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금의 한국 사회 역시 이런 점에서 <스카팽>은 우리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하지만 작품의 유희적인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원작에 비해서 작품이 주는 전반적인 주제의식 자체는 희미하다. 원작에서 ‘스카팽’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옥따브와 레앙드르의 사랑을 돕는다. 자신이 피지배계층일지라도, 사랑과 평화, 정의와 같은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카팽>에서는 ‘스카팽’의 그런 요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스카팽의 재치와 입담이 더욱 부각된다.

연극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연극 시작 부분이었다. 연극 시작 시간이 되고 ‘스카팽’이라고 쓰인 거대하고 빨간 막이 오르기 전, 원작자인 몰리에르가 등장해서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해 설명한다. <스카팽>이라는 작품 속에 몰리에르의 ‘1인극’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 1인극을 통해 관객들은 자칫 낯설 수 있는 몰리에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해서 흥미를 느낀다. 이를 통해 어떤 관객들은 몰리에르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해, 나아가서 연극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사진제공:국립극단)

나는 웃는다, 고로 존재한다

배우들의 현란한 몸짓과 다양한 음악과 음향효과들, 그리고 몰리에르가 보여주는 1인극과 같은 다양한 연출과 각색은 17세기의 희곡이 여전히 현대에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스카팽>이 관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재미를 주는 유희적인 측면에서 성공했다면, 분명 희극이 사회에게 주고자 하는 주제의식 자체는 희미하다. 계급 질서는 사라진 지 오래이며, 신분 차이로 인해 결혼하지 못하는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극 중 인물에 대한 완전한 몰입은 어렵다. 또한, <스카팽의 간계> 속 스카팽이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하며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조용하게 시위하고 있다면, <스카팽> 속 스카팽은 그저 천진난만하다. 이 때문에 작품은 인상 깊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희미하다. 그러나 <스카팽>은 역으로 이 지점에서 빛난다. 메타극의 형식으로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원작과 다른 스카팽을 표현해낸 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스카팽>은 웃음을 통해 무언가를 전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관객의 웃음 자체를 극대화하고자 한 연극이다. 너무나 많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웃음은 사소하면서도 강력한 삶의 활력이다. 적어도 웃는 동안 만큼은 우리는 삶의 어떤 고뇌로부터도 해방된다. 그래서 웃음은 우리를 인간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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