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브레히트는 古典主義 작가인가? (9)


이재진 (단국대 명예교수)

Enemy Alien

어린 시절 친구 네허(Casper Neher. 1897-1962)와 그리 꿈꾸던 캘리포니아! 아메리카는 이제 브레히트에게 친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한밤의 북소리]로 독일 무대에,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럽 무대에 극작가로서의 이름을 크게 올렸던 브레히트는 미국에서는 발붙일 곳을 찾지 못했다. 생활고에 시달릴 처지까지 되었다. 관객이 없는 극작가, “학생이 없는 선생이었다.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에서 브레히트는 한낱 유럽에서 건너온 사상이 건전치 못한 꾀죄죄한 별 볼 일 없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세상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은 브레히트의 변증법적 서사극에 이곳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히틀러의 독일을 떠난 예술인, 지식인들은 5만이 넘었다. 이들 망명객들은 곳곳에서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운명에 관해 토론을 벌렸다. 무엇보다 유대인 학살 등 2차대전의 책임을 히틀러와 그 일당에게, 아니면 독일 국민 전체에게 물어야 하는지 의견을 나누었다. 일부는 전후 독일의 군사, 경제, 정부 등 제반문제에 강대국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레히트는 히틀러의 노예가 되었던 독일국민이 또다시 강대국의 노예가 될 뿐이라며 반대했다. 브레히트 등 문인들 몇이 모여, 전후 독일의 자주/민주화가 세계평회에 이바지 할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런 내용이 담긴 회의록에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도 서명했지만 곧이어 이를 철회한다. 토마스 만과 브레히트는 본질적으로 한 배를 탈수는 없었다. 하기야 두 사람은 상대의 작품을 차분하게 읽어본 적도 없다.

2차 대전에 개입하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미국은 할리우드 예술인 중에서도 미국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외국인 18인을 골라낸다. 러시아 혁명에 동조하는 지식인들(Fellow traveller)이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려는 매카시시대”(McCarthyism)가 찾아온 것이었다. 미 정보부는 브레히트도 요주의 외국인“(Enemy Alien)으로 분류했다. 국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HCUA.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불려나갔다. 질문은 [조처](Die Maßnahme)에 집중되었다. 다행히(!) 위원장은 브레히트의 작품세계를 잘 모르는 의원이었다. 곤란한 질문이 나오면 브레히트는 번역상의 문제로 돌리며 피해 갔다.

청문회에서 혼쭐이 난 후 그날로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도망치듯, – 유럽을 떠날 때 보다 더 성급하게 -, 미국을 떠난다. “그래도 나치만큼 그리 끔찍하지는 않았다. 나치 같았으면 내게 담배를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라고 웅얼대면서. 스위스로 돌아온 브레히트는 서독과 동독이라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미국 군정이 관할하는 서독은 브레히트의 입국을 환영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브레히트는 독일 시민도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곳에는 당국의 지시와 검열이 기다리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동독을 선택했다. 황급히 스위스를 통해 동독에 정착한 브레히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독의 브레히트 보이콧이란 열풍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Casper Neher (출처: 구글)

영원한 보헤미안

동독 1등국가훈장, 스탈린 훈장을 타는 등 사회주의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듯 보였으나 실은 서독만큼이나 동독에서도 브레히트의 입지가 단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냉대와 비판을 받았다. 처음에(에세이1 참조) 보여주었듯이 영원한 숙명의 보헤미안 브레히트는 고국을 등지고 헤매는 하이네처럼 발붙이지 못했다.

동독당국은 브레히트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또 그렇다고 브레히트와 함께 이룩한 성과를 쉽게 버리지도 못했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에서 노동자들 보다는 정육업계기업가들을 관객에게 더욱 돋보이게 내세웠다고 지적했다. 가장 사회주의적인 작품으로 보이는 공산주의 혁명을 부르짖는 [조처],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억척어멈< 등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브레히트는 >억척어멈< 에서 반전주의를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소련이나 중국은 한국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마당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완성하려면 어떤 전쟁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하건만! 한 마디로 브레히트의 작품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사회주의혁명의 영웅(노동자)이 보이지 않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들어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노동자들은 이름 없는 집단의 일부일뿐 어떤 영웅적 실체도, 혁명의 밑그림도 보여주지 못한다고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브레히트를 형식주의 경향의 실험주의자로 몰아갔다. 브레히트의 작품이 추상적인 이유는 사회주의 혁명을 직접 현장에서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비난했다. 자신들이 동독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할 때 브레히트는 편히 미국에서 생활하지 않았던가! 이들 눈에는 브레히트가 사회주의의 성장에 동참하기에는 성분도 좋지 않았다(브레히트의 아버지는 종이공장 공장장이었다.). 당국은 때때로 작품제목의 수정까지 요구했다. 극작가로서 너무나 행복에(!) 겨운 브레히트는 탄식하며 이렇게 반문했다: “세상 어느 나라에 그리 높은 공무원들이 이렇게 깊이 연극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당서기장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 1893-1973)에게서 작품 쓰는 법까지 배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Walter Ulbricht (출처: 구글)

[Coriolanus]

로마의 영웅 코리올라누스 장군은 (Coriolanus. 대략 기원전 527- 488) 서민들을 무시하고 천대하는 성품이다. 로마법은 집정관이 되려면 시민들의 지지를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코리올라누스는 집정관이 되기 위해 천민들 앞에 나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과의 갈등으로 결국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이번에는 적군의 장군이 되어 군대를 끌고 조국인 로마로 진격해 온다. 어머니가 애절하고 간절하게 호소하자 결국 퇴각한다.

셰익스피어가 1608극화하였다. 개선장군 코리올라누스는 집정관이 되고자 로마 광장에 나아가 민중과 직접 대면한다. 일부 호민관은 코리올라누스가 집정관이 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울 가 걱정한 나머지 시민들에게 이를 거부하도록 사주한다. 코리올라누스는 천민들에게는 용감함도 없고 기사도 같은 진실함도 없다고 늘 비난해왔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장군은 시민들에게 자신의 그런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결국 민중이 등을 돌리고 만다. 로마에서 추방당한 코리올라누스는 자신이 물리친 적국으로 가서 그곳의 장군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이번에는 로마를 형해 진격한다. 로마의 운명은 풍전등화다. 옛 동료들이 로마에서 찾아가지만 만나 주지 않는다. 이때 어머니, 아내가 진영에 나타난다. 어머니는 조국 로마에 대한 아들의 의무를 상기시킨다. 어머니는 아들 앞에 무릎을 꿇고 로마의 평화를 애원한다. 경우에 따라 자결하겠다고 아들을 위협한다. 코리올라누스는 결국 물러난다. 회군한 코리올라누스는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비극은 완성된다. 이런 모습을 플루타르크는 코리올라누스의 허약함으로 보았지만 셰익스피어는 오히려 주인공의 고상한 성품으로 승화시켰다.

셰익스피어의 Coriolanus (출처: 구글)

[Coriolan]

브레히트가 이를 각색했다(1951-1955).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이런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민중의 모습이 가려지거나 잘못 전달되고 있다고 브레히트는 생각했다. 민중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요소는 제거했다. 로마는 코리올란에 맞선 일어난다. 브레히트의 코리올란은 어머니에게 설득되어, 즉 효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과신을 깨달았기 때문에 무너진다. 로마가 자신을 향해 무장했다는 사실에서 자신은 누구도 대적할 없는 절대적 인물이 아니라 대체 가능한 평범한 인간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코리올란은 좌절하게 된다. (2016년 안산시 문화원의 주관으로 단대극회의 낭독공연이 있었다. 작품을 이해하는데는 무대공연보다 훨씬 더 효과적임을 보여주었다.)

Coriolan (출처:구글)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 (Die Plebejer proben den Aufstand. 1966)

1953베를린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난다. 이때 브레히트는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귄터 그라스(Günter Grass, 1927-2015)는 노동자 봉기에 브레히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작품에 담았(실제 브레히트는 다른 작품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그라스는 [코리올란]으로 설정했다.).

단장(브레히트)은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를 각색해서 무대에 올리려고 연습중이다. 이때 극장으로 밀어닥친 노동자들은 봉기에 단장의 동참을 요구한다. 노동자들이 아직 성숙되지 않음을 알고 단장은 동참의 선언문을 써주지 않는다. 노동자 봉기는 절정에 이른다. 이번에는 당의 간부가 나타나 공산당과 연대하는 지식인들이 지지성명에 단장의 동참을 요구한다. 단장은 연습을 중단하고 아예 손을 뗀다. 전원적인 고독을 즐기며 호라츠를 읽겠다며 호숫가의 조용한 별장으로 들어간다. (1969년 극회 프라이에 뷔네가 무대에 올렸다. 국중광 연출. 무대는 매우 시끄러웠지만 객석은 조용했다. 관객은 무대의 소란을 이해하지 못했다. )

Günter Grass (출처: 구글)

베를린 노동자 봉기와 브레히트

소련 탱크가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지 며칠 후 문인협회 사무총장이 부끄럽지도 않은가?”라는 글을 실은 신문 전단을 뿌렸다. 바르텔은 노동자들이 경솔했다고 비난했다. 이 기사를 읽고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해결 방법(“해결책”)을 내놓았다. “617일 항쟁이 있고 나서/ 문인협회 사무총장은/ 스탈린 거리에서 전단을 뿌렸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민은/ 정부의 신뢰를 아쉽게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이를 되찾으려면 두 배로 애를 써도/ 힘들지 모른다./ 혹시 이편이 오히려/ 더 간편하지 않을까, 정부가/ 이 국민을 해체하고, 대신/ 다른 국민을 뽑는 편이?”

봉기가 일어나자 브레히트는 동독 서기장 울브리히트에게 제법 긴 글을 보냈다. 브레히트는 그 글에서 노동자 봉기에 대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며 정책 개선과 개혁을 위해 노동자들과의 대화를 강하게 요구했다. 편지 끝에는 관례상 당과 결속한다는 인사말로 마무리했다.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가 1953621일 자 신문에 게재된다. 하지만 당에서는 긴 편지 내용을 삭제하고 끝부분의 의례적인 인사말만 발표했다. “발터 울브리히트 귀하, 이 순간 저는 어느 다른 때보다도 더욱 공고하게 독일 사회민주통일당과의 결속을 서기장님에게 힘주어 밝히는 바입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드림

이후 브레히트는 이를 해명하고자 항의하는 내용의 전보를 울브리히트에게 보냈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어느 곳보다 서독에서 난리가 났다. 브레히트를 좋아하던 일부 서독의 독자들은 분노하기에 이른다. 그나마 많지도 않던 서독 내 브레히트 공연은 취소되었다. 시민들은 공연이 예고된 극장에 나타나 야유와 함께 돌을 던졌다. 브레히트는 인민을, 국민을, 대중을 외면하고 배반한 지식인으로 인식되었다. 브레히트는 민중을 위해 일생 투쟁해 왔다고 떠벌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평화주의자 브레히트는 이제 소련 탱크를 내세워 시위 노동자들을 밀어 버린 동독 당국을 지지하는 사이비 지식인이 되고 말았다. (참조. [코리올란]. 지만지 2017)

1953년 베를린 노동자 봉기 (출처: 구글)

브레히트 수용추세

베를린 노동자 봉기로 인해 생긴 오해와 61년 베를린 장벽으로 서독에는 브레히트보이콧 바람이 크게 일어났었다. 브레히트의 의도가 동독언론을 통해 조작되었고, 결국 사기였음이 점차 알려지고, 더구나 1956년 브레히트가 사망하자, 갑작스레 브레히트붐이 일어났다. 브레히트 유행은 계속 확대될 추세였다. 60/70년대 독일 무대에서 공연된 횟수를 통해 브레히트의 수용추세를 참고할 수 있다.

19611962

셰익스피어 2550, 괴테 2020, 버나드 쇼 1550, 실러 1350, 몰리에르 1170,

브레히트 1080, 레싱 1050

19711972

브레히트 1400, 셰익스피어 1300, 몰리에르 950, 버나드 쇼 620, 실러 450,

괴테 400, 레싱 400

 

*본 기사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필자의 주장에 따라 국립국어원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2 thoughts on “

  1. 이재진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일천한 지식과 부족한 감성으로 그간 글을 읽고도 어떤 댓글도 올리지 못했는데
    오늘은 그저 감사합니다란 말씀을 드리고 싶어 몇자 적어 올려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2. 브레히트의 선택은 항상 흥미롭습니다
    논란이 있는 것도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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