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연극 <아들(Le Fils)>

글_이경서

원작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

번역 임수현

연출 민새롬

제작 ㈜연극열전

장소 대학로 아트원시어터2관

일시 2020.09.15 ~ 2020.11.22.

연극 <아들>은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전작인 <어머니>와 <아버지>에 이어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극은 이혼한 부부인 피에르와 안느, 그리고 피에르의 재혼 상대인 소피아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피에르와 안느의 아들 니콜라를 겪는 이야기이다. 니콜라의 치유를 위해 나선 어른들의 행동과 극 중 인물들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서로 맺는 관계를 통해 이 극은 가족 관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정신 질환을 그저 ‘마음의 감기’ 정도로 다소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사진제공: 연극열전)

극의 제목은 <아들>이지만 이 극은 아들인 니콜라의 시각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니콜라와 그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적 시선으로 진행된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인물의 내면보다는 그들의 행동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극의 주된 스토리가 니콜라의 불안정한 상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의 우울한 내면이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물에 잠기는 소리와 함께 니콜라가 우울함에 잠식되는 모습들이나 피에르네 집의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의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서 극 중간마다 그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 장면들은 매우 조각나 있어서 처음에는 니콜라의 우울한 내면을 계속해서 따라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니콜라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하거나 어른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그저 울면서 사는 게 버겁다는 말만을 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의 불안정한 행동만을 보면서 오히려 니콜라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에게 이입하게 된다. 피에르와 안느는 이혼하기는 했지만 니콜라를 사랑하는 다정한 부모님이며 피에르의 재혼 상대인 소피아 역시 니콜라의 치유를 위해 애쓴다. 그 중 특히 피에르는 과거에 자신의 아버지가 가족을 방치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런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더욱 아들의 문제에 매달린다. 이와 같은 어른들의 노력에 이입하여 극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니콜라를 두고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평가를 믿게 된다. 그러나 극 중에서 니콜라는 표면적으로만 나아진 것으로 보일 뿐 실제로는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결국 관객은 피에르와 니콜라의 갈등이 폭발하고 니콜라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른들의 노력이 엇나가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하게 된다. 피에르는 니콜라가 아픈 원인을 탐색하려고 하기보다는 다 지나갈 순간의 일이라고 일축하면서 니콜라가 다른 아이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해나가기만을 바랐다. 또한 니콜라가 아픈 이유를 자신의 기준으로 정의하고 강요했다. 게다가 피에르는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의무감에 니콜라를 집으로 데려왔지만 정작 자신의 일을 완전히 포기하면서까지 니콜라의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는 않는다. 결국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니콜라의 엄마도, 아빠도 아닌 니콜라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소피아였다. 그래서 소피아는 이 극 내에서 니콜라의 부정적인 심리 상태를 그나마 가장 잘 파악한 인물이 된다. ‘부정적으로라도 보는 게 낫지, 아무것도 못 보는 것보다는.’이라는 소피아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는데 이 대사는 피에르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어느새 피에르의 시선으로 니콜라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태도와 시선이 니콜라에게 있어서는 폭력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관객은 비로소 니콜라의 내면을 바라보게 된다. 이 극은 관객들을 어른들의 시선에 이입되도록 만들어 충격의 효과를 배가시키고 극의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전달한다.

(사진제공: 연극열전)

이 극에서 가장 주목해볼 관계는 역시 피에르와 니콜라의 관계이다. 피에르는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는 피에르의 내면에 풀지 못한 상처로 남아 있다. 아버지 때문에 사냥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피에르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준 엽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집 거실 한가운데에 사냥이 연상되는 사슴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은 피에르가 여전히 아버지와의 부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피에르는 더욱 간절하게 니콜라와의 관계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피에르는 자기 손으로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굴레를 만들어버리고 만다. 피에르는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자기 아버지의 말을 아들 니콜라에게 되풀이했고 니콜라는 과거에 피에르가 아버지에게 느꼈던 분노를 똑같이 피에르에게 표출한다. 부모자식의 관계에 있어서 피해자였던 피에르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정신적 학대가 대물림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극 내내 무대에 걸려 있던 사슴 그림이 니콜라의 죽음 이후 니콜라를 상징하는 그림으로 바뀐다. 사슴 그림이 피에르가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와의 굴레를 의미한다고 보았을 때, 바뀐 그림은 피에르가 이제는 니콜라와의 굴레에 빠지게 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세대만 바뀌었을 뿐 대물림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다만 그 그림은 만약 피에르와 니콜라가 긍정적으로 관계를 전환시켰다면 부정적 상징이 아닌 오히려 극복의 긍정적 상징이 될 수 있었음을 극 중 피에르의 상상을 통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비극성이 강화된다. 이런 관계는 니콜라네 가족에게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다. 이 극은 현대 사회에서 많은 가족이 앓고 있는 가족 관계 내의 폭력과 부정적 대물림을 니콜라의 가족을 내세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진제공: 연극열전)

병원에서는 니콜라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으로 가족과의 분리를 이야기한다. 니콜라의 병의 가장 큰 원인은 이혼한 부모님 사이에서 겪은 혼란 때문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원인이 가족에게 있기 때문에 부모님의 이혼 후에도 계속해서 가족의 ‘아들’로 정의되었던 니콜라는 본인이 인지하지도 못한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왔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족으로부터의 분리는 지속적인 폭력의 공간으로부터의 분리이자 극 전체를 관통하는 지점에서 보자면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정적인 대물림을 끊는다는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피에르와 안느가 니콜라를 퇴원시키는 선택을 하여 그를 다시 가족의 품으로 데려온 것은 결국 그 굴레를 끊지 못했다는 뜻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비극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가족 가운데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인연은 쉽게 끊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특수한 관계인 ‘가족’은 다른 인간관계와는 조금 다른 문제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가족 간의 사랑이란 무엇이며 가족 구성원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또한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신적 폭력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 극은 필연적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끔 만들 뿐 아니라 비극적 결말을 통해 그 질문에 대한 충분한 사유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경각심을 준다.

(사진제공: 연극열전)

다만 이 극은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을 던지는 데 집중하고 있어 그 질문의 답에 대한 고찰은 질문에 비해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 연극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잘 모르겠어(요).’이다.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한 이 말은 연극의 주요 인물들이 계속해서 반복하는 말이다. 니콜라는 자기 안의 우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고 피에르와 안느는 이 상황과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잘 모르고 일은 꼬여만 간다. 이 연극은 극 전반에서 던지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도 ‘잘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결국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관객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극 중에서 어떠한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 대신 관객에게 사유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분명한 의의가 있다. 잘 모른다는 말은 어쩌면 가장 솔직한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 때때로 설명하기 어렵고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스스로 질문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피에르에게는 아직 샤샤라는 아들이 있고, 비록 ‘니콜라’라는 슬픈 결말을 겪었지만 그는 실패를 딛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굴레를 깨어버릴 기회가 남아 있다. 이러한 피에르의 숙제는 동시에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 아들, 그들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One thought on “아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1. 가족의 불화 와 악순환 그리고 우울이라는 주제를 가진 연극의 본질적인 물음에 다양한 측면으로 분석한 평론이었습니다! 인상깊게 집중해서 잘 읽어봤습니다. 사랑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식의 존재는 결국 그 본질적인 사랑의 깨진 가정에서 깊은 우울감을 느끼네요. 인간이 내던져진 존재, 존재의 이유에 대해 탐구하는 존재 라고 정의할때 세상에 처음나와 맺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의 영향력은 강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맺을 수 밖에 없는 가족이라는 관계, 그 관계에 대한 책임감과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마지막 니콜라의 죽음을 통해 소리치는 작품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몰라요를 남발하던 니콜라에게 이런 가족의 관계를 통해 나의 상태가 불안하구나 라는 점만이라도 인지하고 확실한 문제의식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가족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드렸다면 니콜라의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다. 많은 생각을 던져준 서평이였습니다. 훌륭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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