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예술인!

글_황윤동(사)문화창작집단 공터다 대표, 문화예술연구소「점·선·면」소장)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 「어느 「고쿠라 일기」전」

주인공 다노우에 고사쿠는 명석한 머리를 가지고도 장애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되고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어느 날 그는 모리 오가이의 전집 중 오가이가 고쿠라에서 군의부장으로 지내면서 쓴 일기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고 생의 목표로 오가이의 자취를 쫓는다.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아니 자기 인생에서 한 번도 끓어본 적 없는 욕망에 이끌린다. 몸이 쇠약해지고 죽음에 이르러 그의 꿈은 좌절된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오가이의 일기는 그의 아들 집에서 발견된다.

 

예술을 업으로 하는 예술인의 모습은 이 다노우에 고사쿠와 닮아 보인다. 알 수 없는 종착역을 해야 그저 욕망의 이끌림에 의해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처럼 말이다.

사전을 들여다보면, 예술(藝術)은 “기예와 학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 “특별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로 감상의 대상이 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예술인은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편의상 연극이라는 예술장르를 예로 들어 보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시작된 예술이 미술이라고 한다. 그리고 음악, 다음으로 문학 그리고 연극이 예술장르 중 마지막에 탄생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리 있는 주장이라 ‘격하게’ 공감한다. 연극을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여러 분야의 직종이 협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격하게’ 공감하는 것은 마지막에 탄생한 이유가 기능이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앞서의 예술장르가 성숙된 후 이것을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예술이 바로 연극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연극은 최고의 인문 교양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극이 최종적으로 관객과 만나는 플랫폼이 바로 극장인 것이다.

 

인문학이 살아있는 학문이 되려면 인문학 서적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과 언어로 정리할 수 있는 근육을 기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쓰여진 책은 이미 관념화가 된 글쓴이의 것이지 읽는 이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희곡을 공연화 하는 과정에서 바로 생각의 근육이 작동한다. 희곡은 문학 장르이다. 작가가 쓴 언어다. 이 언어를 배역을 맡은 배우가 분석을 통해 작가의 의도를 철저히 파헤치고 해석이라는 자신의 사유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를 예술가라 한다.

 

<명량>의 최민식 님이 연기한 이순신을 영웅(성웅)이 아닌 우리와 같은 범부(凡夫)처럼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인물로 창조하였고 <뿌리 깊은 나무>에서 한석규 님이 연기한 세종을 ‘연산의 마음을 가진 성군’이라는 창조적 해석으로 두 배우 모두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캐릭터를 창조하여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행복했던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 부른다.

문화적으로 성숙한 나라를 말할 때 유럽 선진국의 예를 종종 든다. 시골마을에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아는 그런 환경을 갖춘 도시가 있는 나라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존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시민 말이다. 그리고 예술의 향유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예술의 기능을 향유로만 보는 인식은 예술지원사업을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일설에 의하면 ‘대한민국 연극제는 연극인들의 좋아서 하는 사업이 아니냐, 그러니 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하기 바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관련 부처의 사고방식은 그렇다 쳐도 이를 두고 항의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 한숨만 나온다. 연극제에 출품하는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이 연극인이고 창작물을 선보이는 공간이 연극제이며 그것을 향유하는 자가 바로 관객(시민)인 것이다. 그럼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연극인들의 창작환경을 만드는 데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앙이 이럴진대 지역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대다수 기초지자체의 예술지원은 공연, 전시, 축제라는 명목으로 단체에 대한 사업지원만 있을 뿐이다. 결국 행사로 정리된다. 이 행사에 많은 시민이 와야 한다. 지역 예술인은 인지도가 없으니 대중가수를 불러야 한다. 관객이 없으면 예산이 삭감된다. 돈 앞에 장사 없다. 예술? 예술인? 여기에 무슨 예술정책이 있나? 창조성과 독창성이라는 예술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일회성 사업에 대한 지원만 있을 뿐이다. 그러고는 일회성 행사만 한다고 질책한다. 아이러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유럽의 선진국은 예술의 사회적 파급력과 예술인의 사회적 역량을 국가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보고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선진국이 예술인과 극장에 대한 안전망을 강화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보여준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우리 헌법(憲法)은 제9조에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또 제22조 제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였으며, 제2항에서는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고 하였다. 결국 문화를 발전시키고 예술을 진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사실을 최상위의 법으로 분명히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난 법에 근거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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