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 정윤경

“연극을 하면서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배우 정윤경

 

글_김혜정 기자

 

안녕하세요, 배우님. <그 순간, 시간이 멈춘다>(이하 <그 순간>)가 며칠 전에 개막했죠. 공연 중에 하는 인터뷰라 부담스럽고 정신없을 수 있는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걱정입니다.(웃음)

 

 

제가 공연을 봤던 날도 극장에 관객이 가득 찼더라고요. 주변에서 들리는 공연 평도 좋고요. 몸은 바빠도 마음은 즐겁죠?

아직 사실 잘 모르겠는데 반응이 좋다고 하니까 기분 좋죠. 작품 만드는 데 있어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공연이지만 공연도 긴 과정 중에 있는 거잖아요. 그 과정이 좋았거든요. 스태프나 배우들한테 감사하고 좋은 시간이었어서, 이 작품을 보시는 관객 분들도 좋게 보시면 좋겠다, 지금은 그 정도 마음입니다.

 

<그 순간>은 배우님이 번역한 희곡으로 21년 낭독공연과 22년 초연을 거쳐 이번이 재연이었는데요. 작품을 처음 만났던 때부터 그동안의 발전 과정이 궁금합니다.

좋은 희곡 읽는 건 모든 배우들이 좋아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극단이 있다 보니까 작품을 계속 찾아야 해요. 그런 이유로 보통 1년에 한 번 희곡을 잔뜩 읽는 시간을 갖는데요. 이 도널드 마굴리스 작가는 특히 이전 작품이었던 <컬렉티드 스토리즈>도 그렇고, 너무 좋아해서 작품집도 많이 봤거든요. <그 순간>을 처음 읽은 건 되게 오래전이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되게 매력적이면서도 약간 생소한 느낌이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걸 프로덕션으로, 또 배우로 체화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나중에 다시 읽어봤는데 생각보다 관객들이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제가 관객을 잘 몰랐던 것일 수도 있고 사회가 변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2021년에 박선희 연출이랑 가벼운 마음으로 낭독 공연을 해봤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본 공연을 추진하는 와중에 코로나가 심해져서 못했고, 해가 넘어가면서 박선희 연출이 일정 문제로 빠지게 되었죠. 그 후 작년 초연 때부터는 신명민 연출이랑 하게 됐어요. 초연 때는 사실 프로덕션 내에 일이 너무 많아서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해서 공연을 올렸거든요. 이번에 제대로 해보자고 재정비해서 팀을 다시 꾸리고 하게 된 거예요.

 

©ChadPark

 

신명민 연출님이랑은 이 작품으로 처음 같이한 거죠? 어떠셨어요?

한 마디로 좋았어요. 굉장히 꼼꼼하고 집요하고 섬세한 연출이거든요. 이런 작품, 이런 인물들을 구축하는 데 큰 장점이라고 느꼈어요. 이제는 신뢰가 많이 가요. 신명민 연출과 작업하고 싶었던 이유가, 섬세하게 연출한다는 주변의 추천도 있었지만 창작집단 LAS의 젊은 감각에서 새로운 시각이나 관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거든요. 원하던 대로 작품을 같이 하면서 이 세대는 이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알게 된 것도 좋았어요.

 

처음에는 <그 순간>의 생소한 부분이 걱정이었다고 하셨잖아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세라 같은 캐릭터가 사실 남성 캐릭터였다면 익숙했을 수 있는데 이런 여성은 못 봤던 것 같았어요. 반대로 제임스도 그렇고요. 그때는 관객들이 이 인물들에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배우 분들 연기도 좋았지만 네 인물의 감정이 잘 보였어요. 희곡이 탄탄해서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특징이 그런 것 같아요. 인물들이 입체적으로 구축되어 있고 잘 보이는 것. 그런 작품을 하고 싶고, 그런 작품을 보고 싶어요. 희곡을 보거나 다른 매체를 보더라도 인물에 매력을 느끼는 편인데요. 너무 스토리에 집중해서 인물이 안 보이면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배우라서 그런가 봐요. 개인적인 취향은, 독특하고 낯설고 새로운 인물이면 더 재미있어요.

 

세라는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돌아와서 8년이나 동거한 제임스와 결혼까지 하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가는 선택을 하죠. 그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왜 저렇게까지 할까 안타까운 마음도 크더라고요.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안 되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사실 스스로를 속이고 제도에 기대잖아요. 그런데 세라는 타협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런 면도 좋았어요. 어떤 면에서 저는 이해가 가는 마음이 크거든요. 어떤 일을 하는 게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을 해요. 어떤 일이 힘들어도 그걸 하고 있어야 내가 나인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연기나 연극도 비슷한 부분이 있잖아요. 밀도가 높고 고달픈 일이지만 그 일을 해야 내가 나인 마음이 저는 이해가 가더라고요. 아마 연극하시는 분들은 많이 공감하실 것 같아요. ‘연극을 안 하는 나는 나인가?’ 할 정도의 정체성인 거죠.

 

©ChadPark

 

배우로서의 삶에 비추어서 타협하지 않는 세라의 모습에 공감이 컸나 봐요.

저는 그렇게 용감하진 않아서요. 늘 타협.(웃음) 타협하고 살지만 그렇게 사는 게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은 들어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걸 항상 인식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그런 세라의 상황에서는 순간순간이 중요할 것 같아요. 비단 사진작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당장이 중요하지, 내일을 생각하긴 어렵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선택이 일반 사람의 선택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마지막에 세라랑 제임스가 말없이 한동안 안고 있는 장면이 개인적으로 작품에서 가장 좋았어요. 대사가 없는데도 세라의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져서 여운이 오래 가더라고요.

그 장면 좋죠. 그것도 이 작품의 좋은 점이에요. 너무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걸 또 되게 잘 받아들이잖아요. 서로 변해서 같이할 수 없는 순간이 왔을 때, 물론 싸우긴 하지만 결국 수용하고 그동안의 시간에 대해 감사를 충분히 표현하고 갈 길 갈 수 있는 게, 너무 좋아 보이더라고요. 그런 것도 이 희곡이 좋았던 이유네요.

 

같은 작가였던 전작 <컬렉티드 스토리즈>도 정말 잘 봤어요. 그러고 보면 두 작품 다 갈등을 통해서 관계를 재정립하고, 어떤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 있네요. 그런 이야기가 끌리는 편인가 봐요.

그런 것 같아요. 모든 인물이 다 이해 간다는 것, 다 입체적이라는 것. 그런 게 좋았던 것 같아요. 그 인물들이 특수한 인물들이긴 하지만 우리 모습이 다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도 좋았고, 사람들이 그런 면을 좀 봐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작품을 하고 여러 인물을 맡으면서 사람에 대해서도 좀 더 알게 되고, 저에 대해서도 많이 발견하게 되는데요. 사회를 살아가면서 너무 반목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는 에너지가 저는 좀 힘든 것 같아요. 서로 조금씩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인데, 이런 작품이나 인물을 보면 그런 마음이 조금은 들지 않을까 싶어요.

 

배우분들이 그런 말씀 많이 하신 것 같아요. 연극을 하면 할수록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세상을 알아간다는. 연극이 그런 힘이 있죠?(웃음)

그런 것 같아요. 연극이 아니었으면 저는 되게 별로인 사람이었을 거예요.(웃음)

 

 

©ChadPark

 

연극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연극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꽤 오래 살았어요. 대학 때 ‘연극미학’이라는 김윤철 선생님 교양수업을 들으면서 연극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게 됐고 많이 보러 다니기 시작했어요. 영향을 준 사람이 꽤 있는데 그 수업이 시발점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한번 김윤철 선생님한테 ‘그 수업 듣고 연극하게 됐다’고 말씀드렸더니 ‘잘못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보는 것만 좋아했고 직접 하는 건 꿈도 못 꿨어요. 그때 직장 생활을 했는데 외국계 회사라 여유 시간이 좀 많았거든요. 이것저것 하다가 한양레퍼토리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연기 수업을 듣게 됐어요. 재밌겠다 싶어서 퇴근하고 가서 저녁에 듣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기억이 또렷하게 나는 건,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 직장생활이 힘들기도 했고 제가 되게 모범생으로 살아왔어요. 제 본질은 그렇지 않은데 순응하면서 살다 보니까 뭔가 쌓여있었나 봐요. 연기 수업에서 하는 캐릭터들은 단점도 있고 약점도 있는데 그런 게 다 드러나잖아요. <그 순간> 인물들도 그렇고요. 그 사람으로 말을 하면서 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게 너무 좋더라고요. 눌려있는 부분이 풀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한양레퍼토리 수업하시던 선생님 중에 한 분이 임유영 선생님이었거든요. 저 연극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했더니 한양대 대학원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해주셨어요.

 

그럼 회사와 대학원을 병행하셨던 거예요?

회사를 그만뒀어요. 그때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죠.(웃음) 대학원에 갔는데 연극에 관한 건 다 재밌더라고요. 이론도 재밌고 실기도 재밌고. 물론 쉽진 않았어요. 몸을 쓰고 마음을 쓰는 일을 하면서 살지 않았으니까 굳어 있잖아요.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그러다 결국 하고 싶은 건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죠.

회사까지 그만두는 건 큰일이었을 텐데,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뭐였어요?

이성적인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누가 왜 연극하고 싶냐고 물어보면 백만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었어요. 나중에 들어보면 내가 그런 말을 했어? 싶은, 이상한 말도 많이 했더라고요.(웃음)

 

©ChadPark

 

번역과 연기를 같이하는 분은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요. 번역을 시작한 건 원하는 작품을 하기 위해서였던 건가요?

그 이유가 크고요. 학교를 미국에서 다녔으니까 영어를 좀 할 줄 알았어요. 제가 읽었을 때 좋은 희곡은 번역해서 같이 읽고 싶더라고요. 번역도 재미있어요. 캐릭터의 말을 번역하는 자체가 좀 더 들여다보게 되는 거잖아요. 그게 재밌더라고요. 희곡뿐 아니라 사실 10년 전에 『스텔라 애들러』라는 책을 번역했거든요. 연기에 관한 책인데,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장면연기 수업 교재로 썼던 책이에요. 너무 좋아했던 책인데 한국 와서 딱히 할 일도 없고 학생들 수업도 준비해야 하니까 번역을 한번 해볼까 한 거였어요. 번역은 그 사람의 말을 더 가까이에서 더 잘 듣는 느낌이거든요. 그게 좋아요. 사실 그때 목 디스크가 시작됐거든요. 힘들긴 한데 재미있어요.

 

연극에 관한 건 다 재미있다는 말씀이 맞네요.(웃음) 개인의 즐거움도 있겠지만 이렇게 희곡에 대한 이해가 있는 분이 번역을 하는 건 연극계에서도 되게 반가운 일인 것 같아요.

번역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공연을 위한 대본이라는 거예요. 문어랑 구어가 다른데, 배우니까 구어체에 대한 이해가 있다는 게 장점이죠. 글은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을 수 있지만 말은 지나가는 거니까 그 순간에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책 번역과는 달라요. 한 번에 안 들어오면 놓치는 거잖아요.

 

적극적으로 번역할 희곡을 찾는 편이세요?

그렇진 않은데 읽다가 흥미가 있으면 번역해보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누가 번역해달라고 해서 하는 경우도 있고요.

 

직접 번역한 작품에 역할을 맡는 건 배우로서 희곡을 받는 것과는 마음이 다를 것 같아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제가 번역한 희곡은 좀 더 궁금하죠. 배우들이 어떻게 볼지, 연출은 어떻게 볼지. 연습이 시작되면 배우들이 각자 어투를 찾을 수 있게 하는 작업도 좋아요. 번역했을 때는 저랑 좀 더 친한 작품일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시작하면 모두의 작품이 되는 거고, 또 그렇게 해야 더 좋은 작품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다섯 명, 여섯 명 상상하면서 하려고 해도 저의 말투나 언어습관에서 저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같이 하면 훨씬 더 표현이 다양해지고 풍성해지고 또 정확해지는 것도 있더라고요.

 

 

©ChadPark

 

배우님은 극단 기일게의 대표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외부에 적극적으로 노출하진 않는 것 같더라고요. 이유가 있나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요.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기도 하고, 겨우겨우 하고 있는 걸요.(웃음) 극단 이름이 ‘기일게’잖아요. 가늘고 기일게 할 때 그 기일게거든요. 천천히 조금씩 지치지 말고 가자, 그런 뜻이에요. 극단을 알리고 극단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보다 좋은 작품 하나씩 하는 극단이고 싶어요. 극단이 너무 많이 알려지면 그 무게감에 눌릴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앞으로 극단과 배우님의 가장 큰 목표는 좋은 작품을 꾸준히 하는 것일까요?

좋은 작품을 계속 하는 것. 그리고 창작환경을 마련하는 것. 제가 리더십도 없고 에너지도 별로 없는데 창작환경을 마련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뭔가를 창의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인데 밀어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크리에이티브한 에너지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거니까요. 배우들이나 연출이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겠다 그런 마음이에요. 좋은 창작 환경에서 좋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남은 공연도 파이팅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번 공연은 93일로 막을 내리지만 앞으로 극단 기일게의 작품을 찾아주실 관객 분들에게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려요.

세상에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모습의 사람들이 있고 많은 생각이 있고 삶이 있잖아요. 그걸 좀 더 봤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작품을 보면서 관객 분들이 그런 생각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나랑 다른 사람, 어딘가 모난 사람이라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좀 더 이해했으면, 그런 사회가 됐으면 싶어요.

 

©ChadPark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