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예술인이 살아야 예술이 살고 문화도 산다

글_채승훈 (연극연출가)

 

요새 티브이에 유행하는 토크쇼를 보면 영화나 티브이 드라마에서 뜬 조연급 연기자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는 연극배우 출신들이 단연 많다. 그런데 그들이 나오면 진행자가 꼭 연극 했던 시절의 고생했던 이야기를 물어본다. 그러면 배우는 각종 알바 했던 이야기부터 연 수입이 수십만 원 밖에 안되었다거나, 수 킬로미터를 걸어서 대학로를 오갔다거나 하는 얘기들을 줄줄이 늘어놓는다. 진행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게 듣는다. 출연할 때마다 너도나도 하는 이야기라서 아마도 이제는 전 국민이 연극인 극빈에 대해서는 알 거라고 본다. 물론 방송에서 그런 말 나올 때마다 어떤 연극인들은 사귀는 이성의 부모가 그로 인해 기를 쓰고 반대한다고 볼멘소리도 한다.

 

과거에 연기를 무척 잘하던 중견 남자 연극배우가 병고로 죽었다. 이혼한 그에게는 고등학생인 딸이 있었다. 그런데 그를 만난 동료들의 전언에 의하면, 자신이 살아있으면 딸에 대한 정부 지원이 안 나온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자신이 없어지는 게 도리어 딸에게는 그나마 나은 선택일 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삶의 의욕을 많이 사라지게 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박정근 배우. 50대 중반인 그는 일반적인 알바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언제라도 연극에 출연할 수 있게끔 개인택시를 운전한다. 택시는 큰맘 먹고 친지들의 돈을 빌려서 장만하였다. 하지만 노후를 위한 재정적립은 불가능하다.

 

필자는 2002년도에 서울연극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공약으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연극인복지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당선되자마자 복지재단설립을 추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출범하였다. 재단 설립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나아가 예술인 복지에 대한 필요성을 사회에 환기하고 드디어 ‘예술인 복지법’을 만들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설립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두 재단은 지금 여러 사업을 알차게 진행한다. 연극인 복지재단은 연 사업비 약 4억 정도로 긴급 생계비 지원, 의료비 지원, 자녀 장학금 사업 등을, 예술인 복지재단은 연 사업비 약 1,700억으로 예술인고용보험, 생활 안정 자금지원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 사업은 전업 연극인(예술인)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재단들이 수행하는 질 좋은 사업들도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재단의 지원을 받아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 곧 스프링처럼 원위치 되어서 고난은 다시 시작된다. 좀 더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체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전업 예술인들에게 일정한 노후소득을 보장해 주는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전업 연극인이란 대략‘청년기부터 다른 직업 없이 수십 년간 평균 일 년에 한 편 이상의 작품에 꾸준히 참여해온 연극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청년기에는 알바도 할 수 있고 작품출연만으로도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활동하지만, 노후가 되면 알바도 할 수가 없고 다른 직업도 가질 수 없으며 작품참여도 뜸해져 극빈층으로 바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전업 연극인들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하나가 노후 걱정이라고들 한다. 그 문제는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창조력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른 직업 없이 수십 년 연극에만 전념해온 전업 연극인은 전국적으로 약 1,000명 이내 정도로 추산된다. 그들에게 매달 100만 원 정도씩 지원하면 일 년에 총 120억이 든다. 약 1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업 예술인 전체로 확대해보면 총 1,200억이 든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돈이기는 하지만 예술인 복지정책이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지원책이라고 본다.

 

이경준 배우. 40대 중반인 그는 연극을 쉬는 때에는 건설 현장에서 알바를 한다.

 

 

2023년 기준으로 문체부 예산은 국가 전체예산 640조 중 1% 남짓한 총 6조 7천억 정도이다. 딱 1% 정도이다. 이건 정말 턱없이 부족하다. 매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예산 증액을 약속하지만, 항상 공염불로 끝난다. 서구국가들은 거의 다가 이미 2%를 넘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1% 초반대에 머물러있는 것이다.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체부 예산을 2%까지만 올리면 이런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 아니 0.1%(6,400억)만 올려도 전업 예술인들의 노후 문제는 크게 해결된다. 노후가 어느 정도 안심이 되면 젊어서의 활동도 큰 힘을 받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자기가 좋아서 택한 일이니까 가난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업’이라고 강 건너 불구경처럼만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탓하고 그것을 수정해야지, 자신이 좋아해서 택한 직업은 굶어 죽더라도 스스로 책임지라는 것은 앞뒤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논리라고 본다. 그리고 여름밤 불나방이 등불을 향해 뛰어드는 것처럼, 가난의 계곡으로 떨어질 확률이 99%인 길을 선택한 것을 자신이 좋아서 택한 직업 운운하는 식의 해석은 너무도 잔인하다.

 

그들이 있기에 한류 문화의 성공이 완성되었다. 근래에 드라마의 홍수라 할 만큼 제작 편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다. 채널을 돌리는 대로 드라마가 나온다. 또 영화는 영화대로 발전한다. 그 가운데에서 연극배우들은 디테일이 살아있는 능숙한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견인한다. 그들이 빛나는 연기를 해주어서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천만 관객이니, 드라마 수출이니, 해외영화제 수상이니 하는 성과도 가능해진다. 영달을 포기하고 예술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는 그들을 위해서 좀 더 수준 높고 핵심적인 복지정책이 시행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한 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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