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라일락 <백파>

글: 김충일(연극평론가)

 

별이 뜨는 초저녁 일곱 시 반에 ‘이해와 의미’의 촛불을 들고 ‘의심과 설명’의 동굴(무대) 속으로 찾아드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무대를 찾아 선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때론 상처를 받는 일이 되기도 한다. 구태여 삶의 손익계산서를 따져 볼 때 마이너스가 되는 게 인생의 본질이며, 인간이 인간에게 불행을 접속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지만 불행의 숲 속에 ‘살아남기(생존)’란 뿌리를 내리는 일은 ‘너(타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나’가 아니라 ‘나’에게 ‘너의 문제’를 던져 주면서 ‘상호 깨우침의 마당’을 발맞추어 걷은 일이다.

삶이 그렇듯이 하늘은 어둡고 불투명한 남태평양의 물결은 패잔감에 쌓인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출렁인다. 요동치는 물결 속 물방(고기를 잡지 못했다는 은어)만을 거듭 하던 선원들은 뱃전에서 이런 저런 까닭으로 서로에게 심리적 구토를 일으키며 싸우고 있다. 선원들은 배 안 밖을 가득채운 불안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들이 현실에 대면하는 자세는 갈래갈래 나뉜다. 급기야 연쇄 산상살인이 일어난다. ‘생존이란 움직이는 식물적 수평성과 폭력이란 물리적 수직성의 불협화음’은 거칠고 날 선 파고(波高)를 일으키며 예술의 전당 앙상블 홀을 넘실거리고 있다. 그렇게 초연작 극단 라일락의 『백파(白波)』(이정수 작. 정선호 연출. 2.27(화))는 무대 위에 올랐다.

 

©문익상

 

원양어선이라는 매우 열악하고 ‘배’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폭행, 일의 미숙함이 일으키는 스트레스, 그로 인한 반복되는 반인권적인 행동, 그리고 패스포트를 빼앗겨 하선 할 수 없는 폐쇄감, 돈을 벌어 고국(집)으로 돌아 가야하는 맹목적 압박감 등.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은 선원들을 벼랑 끝(바다 속)으로 내모는 극단적 행동을 유발한다.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그렇다고 사람을 죽여?’ 그럼 반대로 질문해보자. ‘어떤 일을 겪고, 겪어내야 하기에 사람을 죽여?’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같은 공동체적 인격체로써 절대 행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살해동기를 준 무언가가 있지 않겠는가. 그 원인의 나침판을 따라 제대로 된 해도(海圖)를 만들어 보자. 극은 ‘바다 위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인간의 심리를 극한으로 자극한다.

이 작품 속 백파(삶의 현장)를 가로질러 남태평양으로 참치잡이(생존)에 나선 낡은 어선 ‘카브리디스호’는 물리적 수단이나 힘을 사용한 폭력(살인)뿐만 아니라, 언어적 폭력, 가스라이팅, 조작하는 폭력, 굴레에 의한 폭력 등 ‘낫을 든 죽음의 신’이 춤을 추는 ‘추(醜)의 무도회’장 이다. 이 낫을 도구로 하는 춤판은 사회 체제 내(타자와의 관계)의 폭력 즉, ‘물질(돈)’, 권력(위계, 서열, 하극상)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힘’을 본성으로 품고서 <욕망-폭력-희생>의 메카니즘으로 작용한다. 하여 폭력에서 비롯된 삶의 비극적 진실을 찾는 항해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삶의 진실을 형상화하는 ‘미(美)의 축제’로 탈바꿈하여 자리 잡는다.

이 때 ‘선상살인’을 의심하고 설명하는 불가항력적인 힘(폭력)은 욕망(소유 욕망·모방 욕망)이다. 이 폭력 욕망은 경쟁과정에서 욕망실현의 방해요소가 생길 경우 생겨난다. 점차 커져가는 폭력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제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폭력을 폭력으로 속이는’ 살인의 카니발로 속화된다. 그렇게 연쇄 살인의 선원들은 사회,문화적 폭력구조의 결과임을 ‘피칭(배의 앞뒤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일)’의 혼란스러움 속에서 엇박자의 ‘양망(그물던지기)’을 통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의 희생양임이 드러난다.

 

©문익상

 

삶 속에는 인간이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벗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 ‘배후의 힘(Force Behind)’이 있다. 보이는 외면적 삶 뒤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힘, 마치 거미줄과 같이 한번 걸려들면 갈수록 옥조여 결국 파국을 부르는 힘 비극의 단초를 부르는 힘, 이것이 폭력(살인)이다. 이것이 ‘스스로 자리매김(생존)’에 맞서 ‘자멸적인 투쟁’(self-destructive struggle)을 해야 하며, ‘자기됨’의 통제력 밖에 있어 제어 불가능한 모방-폭력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모방욕망에서 시발된 폭력은 일단 한번 시작되면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아서 폭력의 탈출구를 찾기 전까지는 무차별적인 파괴행위가 계속된다. 폭력의 연쇄와 순환만이 계속된다. 암담한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급기야 <백파>는 여기서 고장 난 엔진을 고친다. 극의 에필로그에 촘촘한 별빛이 고스란히 수면에 드리워져, 바다 위인지, 우주의 어느 한 공간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배경으로 ‘극적인 미’를 공유할 수 있는 축제의 공간이 차려진다. 이곳은 ‘카브리디스호’ 선상에서의 생존을 합리화하기 위한 공동체의 연쇄적 폭력이 분출되고, 실제 폭력의 진실은 은폐되었지만, 집단 폭력의 부당성을 드러내고, 물질적 탐욕의 부정적 양상을 ‘정화(purgation)’라는 ‘인간적 희망’의 계기를 찾는 놀이마당이 된다. 이곳에서의 “고통스런 생중사(death-in-life)의 삶”이란 ‘지금, 여기’를 살아내는 우리들의 비극적 삶의 모습이며, 폭력의 순환에 갇혀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론적 속성을 적시해주는 ‘열린 작은 우주’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문익상

 

초연(初演)의 ‘젊은 연극’이 뿜어낸 ‘기대와 불안의 무대 열정’은 뜨겁게 다가온다. <백파>라는 연극의 배를 ‘안전과 만선’의 항구에 귀항하기 위한 정선호 연출의 에너지는 “각 인물들 간의 서사구조의 치밀한 접합과 배우들의 절제되고 다듬어진 무대언어와 동선의 움직임, 무대와 음악의 책임감 있는 디자인과 울림”으로 이어진다. 이에 맞춰 풍겨 나오는 ‘정신적·육체적 땀 냄새’와 어우러져 관객의 몸을 뜨겁게 달구어 주었다. 외로움과 적막감이 감도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의 탐구와 상황의 재발견이란 연극의 본질적인 주제’를 ‘절실한 몸’을 지닌 한 인간으로 재탄생시킨 ‘젊음의 고뇌’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사회적 사다리의 권력화’란 추악하여 은폐하려는 거시적 담론을 ‘거칠고 낯선 숨겨진 언어를 검열 없이 살아있는 구어(口語)로 살려내어, 생존을 위해 한 없이 부서져야할 도덕, 법, 규칙의 경직성이란 악마적 휴머니즘을 미시적 핍진성(逼眞性)으로 오롯이 그려낸 작가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첨언의 말을 건네 보자. 우선 ‘젊은 연극의 노트에 나열 된 목록’의 수렴과 확산작업을 통한 삭제와 보완은 ‘무대전환의 적시(適時)성’과 ‘공연시간의 절도(節度)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예당의 특성상 오케스트라피트로 인한 공간 활용의 제약을 고려하더라도 ’동적 사물인 바다와 배‘의 고착화는 다른 무대예술 매체의 구안(具案)을 통해 ’움직이는 연극‘으로의 보완이 요구된다. 생생한 대사를 뿜어내거나 감칠맛 나는 발성의 톤으로 숨겨줄 수 있는 미묘한 무대 연기의 구사는 배우들의 ’몸 만들기‘가 선행되어야 함으로 연결된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을 지속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면체적 색채의 역동적·충동적 조명의 다양화는 아쉬움을 너머서고 있다, 그러나 <백파>를 제작한 극단 모든 이들이 ’더 좋은 연극‘으로의 욕망을 따뜻하게 끌어안으며, 이에 고무되어 문제해결의 열쇠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은 두텁다. 정신적 난관에 처한 사람들이나 또 다른 희망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햇볕 한 조각과 같은 무대로 거듭나, 빨리 재연으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대전 연극인들의 바람도 함께 적고 싶다.

 

©문익상

 

 

마지막으로 무대 속 ‘타자에 대한 불안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의 껍질을 벗겨내며’ 살아남은 ‘기훈’의 슬픔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으나 결국 발 디딘 이 세계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살아남은 자’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생존을 위해 인정해야 하는 폭력의 대한 극렬한 거부반응’을 보이면서 ‘나와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위해 ‘살아 남겨진’자로 치환된다. 영혼이 깃든 육체에 대한 고통 없이, 현실로부터 탈락이나 추방의 경험 없이 ‘천국’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스스로 인간다움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폭력의 수인(囚人)’에 불과하다. 무대가 보여주는 ‘인간적 보편성’은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폭력의 피해자가 된 영혼 이야기는 폭력을 가한 산 자의 행위에 대한 질타가 된다.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백파(생존)를 뚫고 나가는 고장 난 ‘카리브다스호’(현실)를 벋어나 탑승료를 환불하고 벌써 “캡틴 산타 마리아(폭력)”를 외친 무명(無明)의 관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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