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하 배우의 죽음과 예술인복지 / 오세곤

김운하 배우의 죽음과 예술인복지

2011년 최고은 작가가 사망했다. 생활고를 증명하는 쪽지가 남아 있었다. 세상이 들끓었다. 답보 상태였던 예술인 복지법 추진이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동력에 거의 선언적 수준의 법을 간신히 통과시키는 정도에 그치고 만다.

어쨌든 법에 의거 예술인 복지재단이 출범했다. 예술인 복지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국가기관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도 제2, 제3의 최고은 사건이 이어진다. 정말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 한다”는 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을 예술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할까?

예술은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필수 요소로서 공공재이다. 그런데 정글과 같은 일반 시장 흐름에 맡겨 놓으면 죽거나 왜곡될 위험이 큰 분야이다. 그래서 취약한 부분이 어딘지 살펴서 보호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술의 건강성이 손상되면서 결국 국가와 사회 전체가 약해지거나 위험해진다.

이번 김운하 배우의 죽음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언제나 그렇듯 피상적이고 선정적이다. 주로 연극인들의 가난과 예술인 복지법의 무용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약간 전문성이 풍기는 것으로 애당초 법이 잘못 됐고, 그래서 사각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또한 본질을 건드리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정말 법 때문에 사각이 생기는 것인지 아니면 법의 운용상의 문제인지 분석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추측이 가능하다. 아마 국회에서는 신문기사들을 인용해 가며 문화부와 예술인복지재단을 압박할 것이고, 그래서 일부 법 개정을 추진할 수도 있고, 시행령이나 규칙을 보완하고 새로운 사업을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분명한 건 그렇게 몇 주 지나고 나면 다시 또 다른 최고은 사건이 터질 때까지 잠잠해질 것이다.

예술인 복지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정책을 세우는 데 있어 자주 활용하는 수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작년에 “공연예술 전문인력 표준인건비 연구”란 게 있었다. 그때 보니까 연극인들의 1년 수입이 전체적으로는 약 1600만원 정도 나오지만 배우들의 경우 특히 낮아서 1180만원에 불과했다. 그 중에서 연극 공연으로 번 건 평균 약 460만원 정도였다. 그러니까 약 700만원 정도는 다른 일로 번 건데 예술강사처럼 전공을 살린 교육활동도 있지만 전혀 관련 없는 일이 더 많았다.

작년 기준 최저 임금이 1년 약 1450만원 정도였고 1인 최저생계비는 750만원 정도였으므로 연극인들의 상태가 아주 위험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연극인에게도 부양가족이 있다. 더욱이 문제는 이 수치가 평균치라는 것이다. 최저치로 가면 거의 “0”에 가까울 텐데 평균치만 보다가는 그런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잘 안 보일 수 있다. 정작 정책의 초점은 그런 경우에 맞춰야 하는 건데 그게 잘 안 되는 것이다.

예술인 복지의 최우선 대상은 그렇게 위기에 처한 경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위기에 처한 예술인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최고은 작가나 김운하 배우의 경우처럼 주위에 알릴 생각도 않고 끝까지 버티기도 한다. 그것은 딱히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예술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조차도 무관심한 평소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이들이 위기를 호소한다고 해결이 날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우리의 예산이나 행정이 그렇게 유연한 체계를 갖고 있지 못 하기 때문이다. 1년 전에 미리 확정된 내용이 아니면 예산을 사용하기 어렵다. 또 아무리 긴급한 일이어도 실무자가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소한 일도 책임질 수 없기에 늘 위에 보고하고 판단을 구해야 한다. 그러는 사이 긴급한 상황은 어떤 식으로든 지나가고 만다.

사각을 없애겠다고 법 조항을 고친다. 그래서 한층 정밀한 규정이 생긴다. 그러나 또 사고는 터진다. 아무리 촘촘해도 역시 만에 하나 생기는 위기를 모두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교한 법체계와 함께 유연성과 순발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복지에 있어 유연성과 순발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선 구체적으로 용처를 지정하지 않고 긴급한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다. 아마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음으로 담당자에게 주어지는 적극행정 권한이다. 즉 위급한 상황에서는 “선조치 후보고”가 당연시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 조치가 과잉으로 드러나더라도 문책이 없어야 한다. 오히려 보고하고 허락받는다고 시간을 끌 경우 문책할 정도로 철저히 교육이 돼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예술인들에게도 계몽이 필요하다. 이른바 자기 보호 능력이 될 텐데 아무리 예술이 중요하다 해도 자신이 상하게 되면 예술마저 상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어려움을 주위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또 주위에서 위험한 상태의 동료를 발견하면 즉시 알려야 한다.

물론 그런 제보가 들어오면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고 어떻게든 조치를 취하는 적극적인 행동 조직이 필요하다. 연극인들이 모여 협회를 만들고 다른 예술 장르에서는 보기 어려운 ‘연극인복지재단’을 설립한 것도 어찌 보면 스스로 우리 자신을 지키자는 자기 보호 차원의 행동일 것이다.

제도의 보완을 촉구하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을 귀히 여기며 보호하는 집단적 자구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연극에 전념할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오도록 다 함께 노력할 것을 제안한다.

2015년 7월 1일

오늘의 서울연극 편집인 오세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