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IS 한담만문] 체험에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한 작업

TTIS 한담만문

‘체험에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한 작업’

 

백승무(TTIS 편집주간 대행)

 

 

#with you_1

개인적인 얘기를 해야겠다.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하던 2005년 무렵의 일이다. 당시 스킨헤드라는 극우파들의 테러가 기승을 부렸다. 머리를 빡빡 민 청(소)년 무리들이 백주에 횡행했고, 이들의 테러훈련장면과 실제 테러현장을 찍은 동영상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수시로 집단폭행 소문이 들려왔고, 테러가 아니라 단순살인사건으로 처리된 경우까지 포함하면 매년 피살자 수는 전국적으로 100명을 넘는다는 분석도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페테르부르크에서 베트남 학생과 인도 학생이 테러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with you_2

아무 잘못도 없이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마땅한 대응책이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렸다. 러시아인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고, 씩씩거리며 잠든 날은 악몽을 꾸었다. 밤거리나 외진 골목을 지날 때면 식은땀이 흘렀고, 야간 지하철에선 도주로부터 탐색했다. 밤길을 뛰어가면 오히려 더 눈에 띌까봐 고개를 처박고 마냥 걷기만 했다. 만약을 위해 커터칼을 가방 깊숙이 넣어다니기도 했고, 행여나 하는 마음에 러시아 국가를 2절까지 외우기도 했다.

그렇게 밤길을 피하고, 낯선 시선을 피하고, 험악한 얼굴의 택시기사를 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이런 게 대한민국 여성들이 매일같이 겪는 불안감, 불편함일 수도 있겠구나!’ 우리나라에서 어두운 골목을 걸을 때, 야간 택시를 탈 때, 상사와 단둘이 있을 때, 집단적으로 회식을 할 때, 나는 한 번도 불안하거나 불편한 적이 없었다. 최소한, 위계와 권력을 악용한 젠더 폭력만큼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 어머니는, 내 누이는, 내 아내는, 내 딸은 언제나, 어디서나 젠더 폭력에 노출되어있다.

 

#with you_3

러시아 친구들은 말했다. 그래봤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적잖아. 그리 무서우면 밤에 왜 다녀. 대드니까 그랬겠지. 이게 러시아야, 받아들여…. 쟤네들은 모르는구나, 하고 가슴을 쳤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이해할 의사도, 능력도 없구나, 싶었다. 러시아 친구들에게 외치고 싶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 이건 너희들이 교정해야할 문제야.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항의집회에도 나갔지만 도리어 표적이 된다는 소문이 있어서 곧 발길을 끊었다.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결국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의 자성을 촉구하라고? 외국인끼리 자강운동을 펼치라고? 나는 왜소하고 나약한 외국인에 불과했다. 러시아에서 나는 사회적 소수자였고 물리적 약자였으며 위계의 하부였다. 나의 실존과 무관하게 하부-약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이곳에서 나는 ‘남자’일 수가 있었다.

 

#with you_4

최근 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 그 경험이 떠올랐다.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내 나름의 ‘정서적 기억’인 셈이다. 나의 상상 공포와 피해자들의 실제 고통은 규모와 강도 면에서 비교도 안 된다. 그래도 메소드 연기법은 몰입을 통해 그 아픔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한다. 공감은 몰입에서 오고, 그것은 우리 연극인들이 가장 잘하는 것이다. 피해자 처지가 되지 않으면 그 공포감과 무기력, 수치심, 모멸감, 답답함을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읽어내고 섬세하게 다룰 줄 아는 전문가들이다. 우리 앞에 고통의 텍스트가 있다. 리딩과 분석에 이어 ‘자감’을 형성하고 내면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필요하면 ‘에튜드’도 해야 하고 ‘신체행동법’도 연구해야 한다.

 

#with you_5

나는 연희단거리패가 연극의 미래라고 떠들고 다녔다. 여타 가해자들도 생각 없이 치켜세웠다. 그 글들을 접한 피해자들이 얼마나 아프고 가소로웠을까. 고개 숙여 사죄한다. 내막을 몰랐다면 결국 외눈박이 평론이었던 셈이다. 나의 변명보다 피해자의 고통이 우선이다. 다행히 연극인들의 힘이 조직화되고 있고, 피해자 중심주의가 확산되는 듯하다. 이제 피해자에게 거부 증거를 요구할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합의 증거를 요구해야한다. ‘왜 이제서야’ 하고 물을 게 아니라, ‘여태껏 얼마나’ 하고 아픔을 상상해야한다. 역시나 연극인들이 제일 잘하는 일이다. 그리고 입법운동과 사법개혁까지 이어가야한다. 이것 또한 연극인(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with you_6

모두가 고통을 읽는 나날이다. 기사 보는 것도 힘들고 페북 열기도 무섭다. 하지만 기억하자. 피해자들이 지새웠을 그 수많은 불면의 밤을,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그 숨막히는 통증을. 그리고 ‘미투’ 고백을 위해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한지, 2차 피해의 고통은 또 어떤 것인지도.

또 기억하자. 쑥대밭이 되어버린 이 바닥이 여전히 우리 삶의 터전이고, 여전히 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상과 열정이 녹아있는 곳임을. 우리는 가난하고 허허해도 구차하진 않았다. 호사스럽지는 않았지만 기백이든 낙천이든 뭐든 있었다. 현실감각 부족하고 생활력 떨어져도 영화 대사처럼 ‘가오’는 있었다. 진실을 명명백백 밝히는 일은 우리의 무너진 자존심과 당당함을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지름길이다.

One thought on “[TTIS 한담만문] 체험에 있어서 나 자신에 대한 작업

  1. ‘미투’의 정의가 무엇인가? 단적으로 ‘권력형’ 성폭력이다. 즉 권력을 가진 자가 이를 이용해 여성에 가하는 각종 성폭력을 이르는 말이다. 개인 간에 벌어지는 성폭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연극계의 ‘미투’는 극단대표, 연출자, 기획자, 학교에서의 교수 등에서 자행되는 단원과 제자 학생에 관한 성폭력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개인 간의 성폭력은 한마디로 개인이나 법이 단죄하기 어려워 재판에서 결정될 일이나 ‘미투’는 성격이 분명하고 명확해 이를 모든 이들이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TTIS에 ‘미투’ 대한 글을 올렸다. ‘미두’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현재 대학에서 자행되고 있는 ‘기수문화’의 정체, 그리고 연기교육을 빙자한 교수들에 의한 성폭력의 사례를 나의 경험과 여러 사례들을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 연극계를 뒤흔들고 있는 ‘미투’의 정체는 사실상 대학교육에서 출발되고 있음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편집위원이라는 교수들께서 마음이 무척 상한 것 같다. 내 글이 피해자들에게 2차피해를 주는 사례라는 미명을 들어 삭제하기로 한다고 통고하고 지웠다. 자신들의 일이라 무척 듣기에 거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게 분명한 현실로 들어나고 있다. 눈가림으로 이를 가린다고 해서 현실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런 방법으로는 외려 ‘미투’의 2차 3차 재발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몇사람들에게 내글을 읽혀 물었더니 “편집위원들이 교수들이라 적나라하게 교육현장을 다룬 게 심신을 상하게 한 것” 같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웅졸함이 우리 연극계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글과 이에 대한 2차피해를 우려하는 편집위원들의 두개의 의견을 동시에 게재해 편집위원들의 생각이 오른지 그른지를 우리 모두가 판단할 기회를 갖도록 제안하는 바이다. 아마 이 글마저 실어주지 않을 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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