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배우를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이유

 

_선연 김수미(연극평론가)

 

**릴레이톡톡은 오랫동안 대학로 무대에 섰던 배우들을 찾아갑니다.
긴 시간동안 무대를 지켜왔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의 가치와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이 만드는 연극은 어떤 모습일까요. 릴레이톡톡은 배우들이 지목하는 배우들로 이어나갑니다. 

 

 

김선영은 오래 묵은 김치처럼 숙성된 연기를 한다. 그녀의 연기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 본 사람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지난 인터뷰에서 김종태는 김선영을 지목했다. ‘개인적으로는 모르지만, 인상적인 연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10년 전쯤 사람들 사이에게 김선영이란 이름을 회자시킨 작품은 <경남창녕군길곡면>이었다. 그 작품에서 김선영의 연기는 아주 오래 묵은 김치처럼 숙성된 맛이 났다.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연극배우의 ‘숙성’을 마치 타고난 것처럼 유감없이 발휘했던 젊은 김선영은 그 후로도 꾸준히 연극무대에 섰지만, TV드라마나 영화에서 더욱 빠르게 유명해졌다. 몇 해 전부터는 연극 작품의 제작자로 그녀의 이름이 포스터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최근까지 제작한 연극들은 모두 극단 나베의 이름이다.

 

“연극계가 모르는 수작들이 나베에 있죠(웃음). 아주 굉장한 작품들이에요(웃음). 저희 작품은 연극하시는 분들이 거의 많이 못 보셨을 거예요. 극단 이름도 낯설고 오래되지도 않은 데다가 연출가도 본래 연극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서 많이 낯설죠. 그래서 아무래도 보신 분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올해 지원금을 열심히 신청했는데, 싹 다 떨어졌어요. 제가 생각해도 그럴만해요. 3년밖에 안 된 극단에게 뭘 믿고 누가 지원금을 주겠어요? 심사하시는 분들도 저희 작품을 아무도 못 보셨을 걸요?(웃음) 그래도 우리는 계속 해야 하니까 열심히 꾸준히 지원을 신청할 겁니다.”

 

<모던패밀리> 포스터

 

<모럴패밀리>는 극단 나베에서 유난히 여러 번 재공연된 작품이었다. 작품에 감동한 영화배우 정우성의 극장 지원으로 소소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나베는 3년밖에 안된 신생 극단이지만 매년 꾸준히 신작을 올렸다. 기회만 닿으면 재공연도 열심히 했다. <모럴패밀리>은 벌써 3번이나 공연한 작품이고, <두 형사이야기>, <예술이 죽었다>가 모두 나베의 신작들이다. 올해 4번째 신작도 준비 중이다. 8월에는 <인방갤>(가제)이 노을극장에서 올라간다. 제목도 미정이지만, 극장부터 계약을 했다. 그야말로 기어코 올리고야 말겠다는 제작 의지의 이면이다.

<모럴패밀리>는 정우성의 제작 지원으로 소소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나베 극단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던 정우성은 공연 후에 일면식도 없던 김선영에게 조심스럽게 제작 지원에 대한 의향을 내비쳤다.

 

“편안한 자리에서 인사한 것이라서 그저 한번 꺼내 본 말이겠거니 생각했죠. 그런데 이튿날 아침 문자를 하셨더라고요. ‘어제 말씀드린 사항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으니 다시 미팅 날짜를 잡아주세요’라고. 친한 지인의 지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셨는데, 정우성씨는 제가 특별히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어요. 정말 지원까지 생각해주실 줄은 몰랐죠.”

 

당시 김선영은 드림시어터를 빌렸다. 드림시어터는 3백석이나 되는 중극장 규모다. <모럴패밀리>를 공연했던 100여 석의 작은 소극장에서 중극장으로 옮긴 이유는 연출가가 ‘보란 듯이’ 해보이겠다거나 돈을 좀 벌어보겠다는 야심찬 제작 의도 때문이 아니었다. 중극장으로의 결정은 사실 제작자보다 연출가의 주장이 더 강했다.

영화를 전공한 연출가 이승원은 연극을 만드는 동안 몸소 경험했던 배우들의 열악한 환경이 늘 마음에 걸렸다. 대학로의 소극장이 흔히 그렇듯 배우 화장실이 따로 없어서 공연이 시작되면 배우들은 화장실을 참아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무대 옆에 어둡고 좁은 공간이 분장실인 것도 흔한 일이다. 기회가 되었을 때, 배우들에게 한 번이라도 제대로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는 것이 중극장 선택의 이유였다. 제작진의 야심과 별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드림시어터의 <모럴패밀리>는 이전 소극장 공연보다 훨씬 더 작은 규모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3백석이나 되는 객석에는 모두 박스를 채워 넣어 폐허를 만들었고, 무대 위로 객석을 올린 의자는 고작 30~40석이었다.

 

“새로운 관객들이 많지는 않았어요. 이미 봤던 사람들이 반복해서 보는 경우가 많았죠. 극장 앞에서도 울고 서 있느라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이었다’는 소리를 꽤 많이 들었는데, 제작하는 입장에서 그런 말들은 엄청난 피드백이었죠.”

 

<두 형사 이야기> 포스터

 

극단 나베는 지난 3년간 매년 꾸준히 신작을 올려왔다. 나베의 작품들은 김선영이 제작자로, 남편 이승원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다.

 

배우는 5명이고, 디자인과 오퍼에 관련된 모든 스태프 역할을 1인 다역으로 해내는 핵심 스태프도 있다. 비공식 멤버로는 김용준, 김선민, 김혜진 배우들이 자주 나베와 함께 한다. 김선영 배우는 나베에서 연기디렉터 역할을 하고 있다.

 

“나베 배우들 경력이 모두 10년씩은 된 배우들이에요. 저와의 인연도 깊죠. 연기 디렉팅이라는 것이 서로의 신뢰 없이는 불가능해요. 디렉팅을 하다보면 절반은 우는 시간이죠. 너도 울고 나도 울고. 그 어려운 과정을 너무 잘 아니까. 전 서로 연기만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연출가의 연기 디렉팅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나베 배우들과 연습하다가 안 되면 대사랑 장면도 바꿔요. 연출의 의도를 잘 알기 때문에 큰 의미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바꾸는 거죠. 연출가와 제가 그 지점에서 서로 이해된다는 것이 나베에서는 시너지 효과를 내는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연출가는 김선영의 남편 이승원이다.

 

“영화 연출을 전공했던 사람인데, 연극을 했던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많이 열려 있어요. 저는 연극만 했는데 서로 잘 맞아요. 제게는 굉장히 훌륭한 연출가죠.”

 

<경남창녕군길곡면> 포스터

 

<경남창녕군길곡면>은 연극인들 사이에서 배우 김선영이란 이름을 회자시켜 준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김선영의 농익은 연기는 많은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

 

중학교를 졸업할 때였는데, 국어선생님이 졸업 연극을 시켰다. 영덕에서 나고 자란 김선영은 연극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까짓 거 어차피 창피할거면 이왕 하는 거, 시시한 거 말고 대장을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연출을 맡고 작품을 찾느라 서점이 있는 포항까지 혼자 나갔다. 그 많은 희곡 중에서 오영진 원작의 <맹진사댁 경사>를 골라냈고 김선영은 세상 처음 본 희곡을 수 십 번씩 읽어가면서 각색을 했다.

 

“강구중학교, 나는 4반이었거든요. 5반에서 먼저 <리어왕>을 했는데 재미가 없다고 교감, 교장선생님이 도중에 나가버리셨어요. 다음날이 우리 반이었는데, 아예 안 오셨죠. 그런데 엄청 재밌다는 소리에 교감, 교장선생님이 의자를 들고 도중에 들어오셨어요. 그날부터 저는 그냥 스타연출이 됐죠(웃음).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요. 공연이 끝나고 무대장치를 찢어내는데 여기 가슴 한 가운데가 찌릿하면서 너무 아픈 거예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할 때 저는 무조건 연극연출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그런데 그 시골에서 연극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가 없잖아요. 언젠가 사촌오빠한테 의논을 했더니, 대학을 아무과나 가서 연극반을 가라더라고요. 도덕을 좋아했으니까 과는 철학과를 가기로 하고, 학교 들어가서는 아예 연극반에서 살았죠.”

 

<예술이죽었다> 포스터

 

극단 나베에서 연기디렉터를 맡고 있는 김선영은 나베의 배우들과 한 몸처럼 움직인다. 김선영은 배우 김선영 너머의 것들을 이제 나베의 배우들을 통해 무대에서 보여주고 있다. 나베의 신작들을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한림대 연극반에는 연극평론가 한상철 교수가 있었다. 덕분에 공연예술아카데미를 알게 되었는데, 애초에 지원하고 싶던 연출과가 미달이 되자 괜히 싱거운 생각이 들어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연기과로 전향해 오디션을 봤다. 그 곳에서 연기과를 다니는 동안 김선영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연출이 아니라 연기 디렉팅을 하고 싶었다. 연출은 알면 알수록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영역이 아니었다. 김선영은 연출과 연기디렉팅의 역할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베 극단은 김선영의 그 오래된 생각을 나름의 방법으로 구축해가고 있는 환경인 셈이다. 연기디렉터라는 자신만의 영역에서 서둘지 않고 차근히 작업해나가고 있지만, 김선영은 직접 현장을 뛰는 배우이기도 하다. 연기디렉터로서의 그녀는 영화, TV드라마, 연극의 연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나 TV, 연극에서 연기가 다르다면 그건 배우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결국 연기는 같죠. 다른 거, 있어요. 영화와 TV는 스태프들이 장면을 만들어주지만, 연극은 배우가 직접 제 눈빛과 몸으로 시공간을 만들어내야 해요. 그래서 연극 무대에서 배우가 위대한 거죠. 예전에 인상적인 러시아 배우를 한 명 본 적이 있어요. 무대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어떤 장면이었는데, 걸어가는 동안 배우의 몸에서 점점 변하는 에너지가 객석으로 고스란히 느껴졌죠. 아,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짜릿했어요. 그건 오로지 연극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이죠.”

 

관객이 느낄 수 있는 배우의 에너지, 관객과 배우의 화학 작용. 배우와 관객이 한 공간 안에서 만날 때 이루어지는 연극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스크린으로 가로막혀 관객과 배우가 직접 만나지 못하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다. 김선영에게 많은 영감을 준 연극배우는 예수정과 김용준이다.

 

“예수정 선생님은 진짜예요. 저는 그게 제일 중요해요. 배우는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베에서 <예술이 죽었다>부터는 김용준 배우과 계속 함께 했어요. 선배는 최고예요. 나는 선배 연기가 나베 무대를 만났을 때 가장 빛이 난다고 자신해요. 배우는 모두 진짜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배우는 없어요. 저는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장점들을 하나씩 끌어 모으죠. 그게 제게는 마르지 않는 인풋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배우는, 메릴 스트립? 그녀는, 확실히 달라요. 그녀 연기는 다 찾아봤죠. 최근에 연설이랑 인터뷰한 것도 보았는데, 그녀는 그런 걸 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매순간 점검하고 객관화해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정말 위트가 있죠. 배우가 가진 유머나 위트는 정말 중요해요. 사람에게 웃음이란 포인트가 너무 중요하잖아요. 전 그것을 배우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배우의 유머나 위트라는 것은 위로의 다른 말이죠. 나는 그런 가능성을 가진 재료예요. 그런 면에서 내게 배우란 정말 가치 있는 직업이죠.”

 

<경남창녕군길곡면>의 공연 장면

 

김선영을 무대에서 보는 관객은 행복하다. 그녀가 먼저 연기라는 행위로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것은 우리의 삶에 위안을 주는 흔치않은 선물이기도 하다.

 

김선영이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는 한동안 어떻게 하면 연기가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연기가 가치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제는 연기의 진정성을 고민한다. 김선영의 고민은 여기까지 와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제 자리를 다져내고 도전하고 찾아낸다. 적어도 그녀의 이것은, 극단 나베의 숨겨진 수작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된다.

* 다음 배우는 산수유 극단의 신용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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