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법

배우 남동진

 

글_선연 김수미(연극평론가)

 

**릴레이톡톡은 오랫동안 대학로 무대에 섰던 배우들을 찾아갑니다.
긴 시간동안 무대를 지켜왔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의 가치와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이 만드는 연극은 어떤 모습일까요. 릴레이톡톡은 배우들이 지목하는 배우들로 이어나갑니다. 

 

릴레이배우 인터뷰는 배우가 배우를 직접 추천하고 그들의 선택으로 다음 배우를 이어가는 칼럼이다. 지난 호에서 배우 신용진은 남동진 배우를 추천하면서 ‘이상적인 배우’란 표현을 썼다. 그는 남동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철학’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배우의 시선, 그만의 남다른 철학. 남동진의 그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김솔)

남동진은 거의 30년을 연기한 연극배우다. 가끔 강의를 나갈 때도 있지만, 다른 분야에 대한 욕심을 가져본 적 없는 외길 배우다. 그런데도 필자는 그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프로필에 적힌 작품 수가 적은 편도 아니었고, 지난해 초에는 그가 출연했던 작품까지 봤는데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물론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이 인터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평론가 한 사람이 모든 연극과 배우를 기억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만나본 후에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남동진은 평범한 얼굴로 차분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배우다. 첫인상에서부터 들끓는 욕망과 카리스마를 알아차릴 수 있는 캐릭터 강한 배우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주의를 기울여서 보고, 애써서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그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사실상 연극무대 배우의 80% 이상이 대부분 그렇다. 얼마 전 고인이 되신 구히서 선생님은 그런 배우들을 10년, 20년씩 묵묵히 지켜보면서 찾아냈던 평론가였다. 그녀가 자주 강조했던 사실은, 배우로서 무르익어 가는 절대적 시간의 중요성이었다. 진짜 배우는 그래서 오래 걸려야 보이고 평범한 얼굴일 때도 많다고 했다.

산티에고를 걸어보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마음속에 그려보는 그곳에는 하루에 20킬로미터 이상을 5시간, 6시간씩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의 표정에 담긴, 평범하지만 특별한 것이 있다. 무욕의 소박함. 남동진의 얼굴에도 그것이 있다.

 

서두를 것 없이 내내 그 자리에서

 

<아일랜드>(ⓒ김준영)

남동진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내성적이라고도 보지만, 사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응원단장을 할 정도로 꽤 외향적이었다. 구성원을 이끄는 리더십의 남성성도 강했다. 그랬던 그가 사춘기를 겪는 동안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말을 잘 안하고 내성적인 성향이 강해진’ 사춘기 아들을 걱정하던 아버지는 남동진을 치유(?) 차원에서 연기학원에 등록시켰다.

“아버지가 외향적인 성격에 사람을 좋아하셨어요. 제가 사춘기를 겪는 모습을 보시면서 걱정을 하셨던 거죠. 말도 없고 사회성이 없는 제게 연기학원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3학년 졸업하고 바로 보내셨는데, 그게 아버지한테는 가장 큰 실수였죠. 제가 진짜 연기를 할 줄은 모르셨으니까요. 그만해라, 하는 소리 많이 하셨죠. 아버지는 지금도 반대하세요.”

학원을 자그마치 2년이나 다녔다. 전공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디션을 보고 본격적으로 연기자로 데뷔할 만큼 배우가 되려는 마음은 절실했다. 극단 모시는사람들의 청소년 뮤지컬이 첫 데뷔작이었다. 군대가기 전까지는 더러 영화도 찍었고 부지런히 다양한 현장 경험을 했다. 군대를 다녀와서는 연극집단 반 창단 멤버로 합류했고, 20년 가까이 연극집단 반의 단원 생활을 했다.

처음 10년간은 아동 청소년 작품이 많았다. 이후 10년 동안은 타 극단 작품이나 외부 연출가들과의 작업도 점차 늘어났고, 연극집단 반에서도 작품이 다양해졌다. 밀양연극제에서는 2002년과 2012년에 걸쳐 남자연기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고, 2008년 고마나루 연극제의 남자우수연기상을 수상하면서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연극집단 반의 대표였던 박장렬 연출가가 바빠지면서 초창기 멤버였던 남동진이 대표를 맡아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남동진은 극단 운영보다는 배우로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연출가 서지혜와 함께 2011년 겨울에 새로운 극단 프로젝트 아일랜드를 만들었고, 2012년에 <아일랜드>를 극단의 첫 작품으로 올렸다.

특별한 지원금도 받지 못한 신생극단이어서 여건이 풍족하지 않았지만, <아일랜드>는 기회가 될 때마다 극장을 옮겨 다니면서 재공연했다. 3년 동안 재공연을 여러 번 했고, 제대로 이해하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매번 조금씩 더 애를 썼다. 주변에서 관심있게 지켜보던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서 언젠가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남아프리카도 다녀왔다. 열흘 동안 체류하면서 쓸 수 있는 돈은 삼십만 원이 전부였지만, 비행기를 타고 현지로 날아가서 작품의 배경인 곳을 직접 밟는 일은 더없이 중요한 체험이었다. 다녀와서는 연극 과정을 기술한 <아일랜드>(북치는 마을)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남동진은 마치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흙바닥을 긁고 있는 코뿔소 같다. 오랫동안 하나씩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처럼 남동진은 흙을 충분히 파내고 안정적으로 발굽을 밀어 넣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든다. 딱히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무심한 얼굴로, 삶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마저도 적당한 무게로 짊어진 채로, 내내 그 자리에서 그는 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타인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2012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컬리쳐에서

아프리카를 다녀오면서 남동진은 사뭇 달라졌다. 작품에 진정성이 더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 에이즈 환자들에게 봉사했던 경험은 삶의 태도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타인에 대한 책임을 배웠어요. 그곳에는 에이즈 환자가 처녀랑 자면 낫는다는 잘못된 미신이 있어서 여자아이들을 산에 데리고 가서 강간을 많이 한대요.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에이즈에 많이 걸렸어요. 거기서 선교하는 목사님이 돈을 모아 산을 사고는 몽땅 불에 태웠대요. 숨지 못하고 다 보일 수 있게 한거죠. 그때 넬슨 만델라가 말했던 타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어요. 사람을 대할 때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말수가 적은 그가 정치나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프리카 여행 이후에 일어난 변화다. 남동진의 페이스북에는 사회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의 분명한 목소리가 담긴다. 2002년에 극단 프로젝트 아일랜드의 첫 작품으로 올렸던 <아일랜드>는 2014년 삿포로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았고, 2016년에는 북해도 연극재단의 올해의 연극상으로 대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의 우수성을 확실히 인정받기도 했다.

프로젝트 아일랜드 극단은 <아일랜드> 이후에 <현장검증>(2015),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2017, 이후 ‘일상’)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일상>에서 남동진은 빼뜨르 역할을 맡았다. 당시 남동진의 연기는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얻었고, 2018년에 남동진은 이 작품으로 서울연극제 연기상 수상과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까지 수상했다. 이로써 프로젝트 아일랜드 극단의 <아일랜드>와 <일상>은 자연스럽게 공식 레퍼토리가 되었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쉼표스튜디오 박종명)

지난해에도 극단에서는 어김없이 <아일랜드>와 <일상>의 재공연을 올렸는데, 연초와 연말에 걸쳐서 신작 <고독한 목욕>과 <BULL>을 두 편이나 올렸다. 네 작품에 모두 남동진이 출연했다. ‘남동진은 한 해에 한 작품만 한다’는 비공식적 소문에 비하면 작년의 숨 가쁜 일정이 그에게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올해는 숨 고르기를 하면서 하반기에 올릴 작품 하나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다.

“작품을 찾아내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3주 전에도 신작을 찾으러 교보문고를 갔는데, 없더라고요. 희곡 파트 책장도 예전에는 세 개 정도는 있었는데, 지금은 한 개밖에 없어요. 그만큼 희곡이 안 나온다는 거죠. 서점이 예술가의 집이나 예술센터보다도 책이 없어요. 어쩌다가 괜찮은 해외 작품을 발견해도 번역은 번역대로 감수가 필요하고, 작가에게는 원작료를 매번 줘야 하는데, 할 때마다 싸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올라가요. 작은 규모로 운영되는 극단에서는 이런 비용에 부담이 크죠.”

누군가의 책임, 누군가의 역할이랄 것도 없이 연극은 함께 고민을 나눠 갖는다. 배우도 무대 세트와 마땅한 소품을 고민하고, 스태프도 각자의 위치에서 배우의 고민을 함께 갖는다. 그래서 연극배우는, 대사 외워서 분장하고 무대에 서는 단순한 직업이 아니다. 단원들과 함께 작품을 찾아 몇 달씩 헤매고 밤새워 고민하고, 연습실을 구해서 직접 공사도 하고, 무대에 세울 장치를 찾아 만들고 홍보하고 알리는 일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달리면서 하나씩 해결해가는 일, 그게 남동진이 알고 있는 연극이다. 단원들과 십시일반으로 마련한 길음동 연습실도 단원들과 며칠 동안 직접 방음 공사를 한 곳이다. 프로젝트 아일랜드 극단에는 현재 신입 단원 7~8명을 포함해서 총 15명 정도의 단원이 있다.

“극단을 만들어서 작업하다 보면 아쉬운 점이 많아요. 새롭고 좋은 기술에 대한 욕심이 생겨도 딱히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없다는 게 제일 아쉽죠. 음향이나 조명 같은 데에서 실험적인 아이디어가 생겨도 저희처럼 작은 극단으로서는 경제적인 면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마음껏 해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거나 지원해주는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희극과 비극을 횡단하는 코미디를 꿈꾸며

 

<고독한 목욕>(ⓒ국립극단)

십여년 전, 국립극장 무대에 서던 날 아버지를 초대했다. 그때 아버지가 그러셨다. “이제는 먹고 살겠구나. 밥벌이는 하겠어.” 물론, 현실이 썩 그렇지만도 않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그 말씀은 가슴에 매달려있던 돌멩이 하나를 가볍게 툭 떼어 냈다.

“지금까지 제가 맡았던 역할은 거의 다 제 나이와 비슷한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리어’만 달랐죠. 30대에 했거든요. 잘 몰라서 쉽게 했던 것 같아요. 그 이후에 국립극장에서 영국 NT의 <리어왕>을 영상으로 봤는데, 나이 많은 영국 배우 사이먼 러셀빌의 연기는 거의 충격적이었어요. 제가 놓치고 간 아쉬운 부분을 많이 발견했어요. 그래서 나이 들면 꼭 다시 하고 싶어요. 리어를 잘 할 수 있는 배우로 늙었으면 좋겠어요. 저, 하고 싶은 장르 중에 코미디도 있어요. 코미디가 만만치 않거든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꿈은 꿔요.”

사실상 남동진이 30대에 연기했던 ‘리어’는 고마나루연극제에서 남자우수연기상까지 안겨줬던 역할이다. 기대만큼 해내지 못했다는 기억 때문에 남동진의 리어는 수상의 자랑스러운 이력보다 평생 잊지 못할 아쉬움으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리어가 잘 어울리는 배우로 늙고 싶다면서도 남동진은 엉뚱하게 코미디가 하고 싶단다. 처음에는 갸웃했는데 상상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남동진의 코미디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웃음이라는 것이 대상으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두기와 관조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전제라면, 코미디란 것이 배우의 삶과 경험까지도 푹 고아 배어들게 하는 진정성있는 연기의 무엇이라면, 이제쯤 남동진은 진짜 코미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의식 없이 넘나드는 무욕의 표정으로 남동진은 그것이 가능할 법도 하다.

그는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대상보다는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먼저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거꾸로 대상의 본질을 읽어낸다. 다음 호의 릴레이배우로 강애심을 추천한 이유가 그런 맥락이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사람을 대하는 마음, 남동진은 강애심의 특별한 그것들을 연기보다 먼저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강애심이야말로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넘나드는 블랙 코미디형 배우다.

“애심 선배님은 처음 뵌 건 제가 20대였을 때죠. 옛날 바탕골소극장에서 공연하신 작품이었는데, 천상병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 역을 하셨어요. 보조석 깔고 맨 앞자리에서 봤습니다. 그 때 공연을 보면서 애심 선배님 연기에 눈물을 펑펑 흘렸어요.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애심 선배님과 하면서 스물 몇 살, 그때에 제가 그분의 연기로 감동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애심 선배님은 감성이 풍부하고 따뜻하신 분이에요.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움이 겉으로 유머러스하게 표현된다는 걸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선후배들이 권위적으로 잘 못 느껴요. 관계도 평등하게 보시지만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하세요. 선배님에게 보고 배운 게 많습니다. 저도 꽤 감성적이라서 애심선배님하고 케미가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저만의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제가 좋아하는 애심 선배님을 적극 추천합니다.”

*다음호의 릴레이배우는 강애심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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