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화가 나는데 어디에 화를 내야 할지…’
관계의 피로감

연극 <동시대인(同時代人)>

 

글_오유경(극단 그룹動·시대 연출)

작   전성현
연출   윤한솔
단체   그린피그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일시   2020년 3월 28일 ~ 4월 5일
관극일시   2020년 4월 2일

 

 

어제 오후, 가족 모임에서 우리 집 강아지의 문제 행동에 대한 열띤 대화가 있었다. 좋은 말로 대화이지 사실 본인을 향한 일방적인 성토였다. 의견인즉슨, 강아지의 버릇을 문제 있게 만드는 장본인이 ‘너!’라는 것이다. 조목조목 따지기에는 가족 안 위치나 조건이 미미(微微)한 ‘나’로서는, 어느 정도 인정은 하지만 100% 동의하지 않는 드러낼 수 없는 변명의 말만 속에서 들끓었다. 뭘 그렇게 하나하나뭐 그런게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나중에 한 바탕 하면 되지…’ 작품 《동시대인(同時代人)》에서 반복되는 대사이다. 작품 《동시대인(同時代人)》은 평범한 일상, 관계 속에서 오는 피로감을 담담히 하지만 향은 짙게 담고 있다.

두 사람만이 등장하는 45개의 짧은 장면들. 친구, 연인, 친척, 동창, 직장동료, 가족, 고용인과 고용주, 선후배, 동기, 세상 속 수 많은 다양한 관계. 작품 《동시대인(同時代人)》은 관계 속에서 행복한 사람이 없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삶 속에서 부지런하고 열정적이지만 전혀 함께하지는 않는다. 관계의 피곤함. 관계의 피로함. 모두 화가 나 있다. 모두 어긋나 있다. 서로의 속마음을 몰라서 안달하고 예민하고 솔직하지 않다. 마주 앉아있어도 마주치지 않는 눈. 연습장 노트 위로 서로 갈등하는 손. 듣기 싫은 귀. 관심 없는 냄새. 수동적인 사람과 공격적인 사람. 주장하는 자와 방어하는 자. 취향과 경험과 지향이 다른 사람들은 갈등 속에서 불편한 속을 애써 숨기며 중얼거린다. 괜히 좋으니까 그렇지. 안 그러면 나중에 한바탕하면 되지. 다른 중요한 것 생각할 것도 많은데.’ ‘뭘 그렇게 하나하나네 일 내 일이 따로 있냐그런게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한 번 만 더 생각해볼게.’ 45개의 장면은 등장인물도, 나누는 대화의 주제와 소재도 다 다르다. 이 몇 대사 만이 꾸준히 반복된다.

 

 

활짝 열린 개방형 무대. 벽이 뚫린, 분장실까지도 무대로 드러나 보이는 완전히 열린 무대다. 무대 양 날개(wing)는 모두 걷어내고 극장의 구조를 날 것으로 드러냈다. 백색의 조명 아래 안 보이는 곳이 없다. 무대 한가득, 사람들이 모이고 앉고 머무는, 세상에 있는 다양한 공간들을 경계 없이 배치해 놓았다. 크고 작고 다양한 형태와 재질의 탁자와 의자들. 소파, 벤치, 이층 침대. 자취방, 길거리 신호등 앞 건널목, 중학교 운동장, 체육관, 도서관, 카페, 병원 앞 광장, 이벤트 행사장, 인근 산 중턱, 백화점 탕비실, 복덕방, 택배 사무실, 은행 안 정수기 옆. 실내와 실외가 섞여 공존한다. 초록, 보라, 노랑, 분홍, 밝은 갈색, 다양한 색감이 튀지 않게 생동감을 준다. 군데군데 놓인 초록색 식물이 무대를 싱그럽게 한다. 무대 정 가운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배경 막에 영상으로 보이는데, 달팽이 관처럼 동심원 모양으로 가득 흩어져 배치되어 있다. 유리볼에 담긴 만들어진 장난감 세상 같다. 우리의 세계를 그대로 들여다보는 기분. 유리볼 세상을 들여다보듯 관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정히 무대를 바라보게 된다.

 

 

무대 위에서 4대의 카메라가 장면에 따라 장소를 옮겨 다니며 거시적 시선에서 놓칠 수 있는 세밀하고 은밀한 부분들을 포착하여 배경 막에 영상으로 실시간 보여준다. 서로 안고 대화하는 중의 연인의 입과 눈. 구겨 쥔 종이컵, 한 여인의 뒤통수 너머 보이는 마주한 여인의 흐릿하게 뭉개진 얼굴. 자꾸 손이 가는 시린 무릎. 카메라는 멀리, 크고, 넓게, 또 가까이, 자세히, 극도로 세밀하게, 한계를 가진 우리의 눈을 대신하여 때론 무심히 때론 집요하게 세상을 들여다본다. 무대감독이 노출된 것처럼 카메라맨들도 노출되는데 자연스럽다. 붐마이크도 간혹 들어오는데 보이지 않는 먼 장면에서 두 등장인물의 대화만은 스피커를 통해 매우 가깝고 숨소리까지 세세히 들리게 해준다. 극장 속 무대. 그 무대 속 세상. 등장인물들을 카메라로 찍는 카메라맨. 그들 모두를 바라보는 관객. 중첩된 공간과 중첩된 관찰자들. 중첩되게 조망되는 일상의 순간들. 이 모든 설정은 관객으로하여금 이 극으로부터 이성적 거리와 분석적 태도를 지니게 한다. 이런 상태의 관객에게 극은 영상을 통해 다소 생경하게 메시지를 투여한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하얀 풍선들. 바람에 날아오르는 검은색 비닐봉지의 무심한 듯 허망한 비상(飛上). 그리고 장면 중 느닷없이 영상 안에서 터질 듯 선언되는 글귀 혹은 문자의 생김.(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다 기록하진 못했지만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천막 열린 틈으로
나무 향이 바람을 타고
약하지만 끈질기게 들어온다.

상자 어디에선가
물건이 터졌는지
들썩일 때마다
김치 냄새가 났다.

놀라 커지는 콧구멍으로
향수 냄새가 빨려 들어간다.

등장인물들의 갈등의 순간. 답답한 그들의 가슴 속에 느닷없이 후각의 본능이 강력하게 일깨워진다. 관객은 그 순간을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으로 그 강렬한 느낌을 감각한다. 장면 속 등장인물의 말과 행위와 내용은 진심이 숨겨진 뭔가 진짜가 아닌 가짜로 여겨진다면, 후각의 본능은 숨길 겨를도 없이 피할 수 없이 공격적으로 순식간에 진짜를 감각하게 한다.

 

 

작품 《동시대인(同時代人)》은 오프닝(opening) 음악도 없이 침묵 속에서 무대감독이 노출되어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한 배우가 등장하고, 붐 마이크가 들어온다. 오르골 소리가 들린다. 배우는 탁자에 앉아 오르골을 연주한다. 오르골 소리가 날 것으로 들린다. 배경 막에 오르골을 움직이는 그녀의 손이 줌(zoom-in)이 되어 중계된다. 마치 그 시작이 멈춰진 세상이 드디어 시작되는 것처럼. 극의 시작을 알리는 본 종이 울리기 전, 이 오르골 장면은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무언(無言)의 안내도(案內圖) 같다. 공사장 소리, 와창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 무너지고 깨지는 소리, 학교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 비행기 나는 소리, 간간이 멀리서 들리는 백혈병 어린이를 위한 자선음악회에서 연주되는 소리. 일상의 소리들이 존재한다. 이 소리들은 장면이 이어지는 중에 반복해서 들리는데 45개의 장면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좀처럼 음악이 없는 이 극에 극의 마지막에 한 배우가 등장하여 노래한다. 구름 속에 들어가면 쉴 수 있겠지그 골목을 떠나지 않았네.’ 주제곡인가. 2시간 넘게 냉정한 침묵 속에서 세상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낭만인가.

 

 

어느 순간 뒷무대 가운데에서 공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달처럼 차오르는 거대한 풍선. 그 크기는 무대 전체를 가득 채우는 정도다. 그 하얀 공의 크기를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긴장감이 돈다. 스쳐 지나가는 수 없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며. 거대 풍선이 마치 볼록거울 같다. 마지막 등장한 그 배우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거대한 풍선은 객석을 향한 방향으로 굴러 나온다. 무대는 삶의 그림자, 삶의 고단함. 삶의 그 흔적 안으로 공은 가차 없이 밀고 들어온다. 그리고 세상은 거대 풍선의 공격에 무너진다. 이 사이를 노래 부르는 자는 피해 다니며 계속 노래한다. 순간 암전. 극이 끝났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암전 없이 잠시 어두어지다 이내 다시 밝아지던 조명설정에 익숙하던 차, 갑작스럽게 방비 없이 당한 야멸찬 어둠은 느닷없이 버려진 것처럼 쓸쓸한 기분이 들게 했다. 예상치 못한 거대 공의 공격에 삶은 일순 즐거웠지만, 손에 든 유리볼 세상을 와장창 깨뜨린 것 같았다.

 

 

1인다(多)역. 작품 《동시대인(同時代人)》 속 등장인물들은 그들 각각이 어떤 사람인가는 중요치 않다. 서로 다 다른 다양한 나이, 성별, 직업과 관계를 지니고 각기 다른 대화를 나눴지만, 모두 하나의 같은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일까. 같은 형태의 갈등 양상과 갈등의 어조가 하나의 패턴처럼 반복되면서 단조로움이 짙어졌다. 이것은 의도일까. 그래서일까. 무대 위의 재현된 세상이 영상 위로 적힌 글귀의 위용만큼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작품 《동시대인(同時代人)》은 움직이는 현대미술을 보는 듯 미학적이다. 그리고 그런 전시를 관람했을 때 찾아오는 쓸쓸한 공허감이 극을 보고 돌아서는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이 공연은 4월 1일에 일찍 막을 내렸다. 대신 영상촬영을 통해 남은 일정을 대신했다. 4월 2일 공연영상촬영날 빈 객석에서 마스크를 쓴 유일한 외부관객으로서 이 공연을 관람했다. 관람을 허락해 준 윤한솔 연출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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