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으로의 환상여행

<반쪼가리 자작>

연극평론가 고수진

현대 이탈리아 작가 중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로 불리는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1923년 쿠바의 산티아고 데 라스베가스에서 태어났다. 농학자인 아버지와 생물학자인 어머니를 따라 세 살 때 이탈리아로 이주한 칼비노는 부모의 영향으로 1941년 토리노 대학교 농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1943년 무솔리니 정권의 징집을 피해 레지스탕스에 참가하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떠 해방 후 공산당원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이탈로 칼비노 (Italo Calvin 1923~1985)
(출처:kyobobook.co.k)

젊은 시절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그는 1940년대 후반부터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등 지식인의 사회참여 메시지를 담은 신사실주의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곧 신사실주의가 현대산업사회의 다양성을 수용하기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새로운 유형의 작품 창작에 도전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며 칼비노는 현실과 환상을 결합한 글쓰기 방식을 선보이는데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이 바로 <우리 조상> 3부작이다.

<우리 조상 3부작>의 이탈리아판 표지
(출처: abebooks.com)

멋모르고 나간 전쟁터에서 대포를 맞고 몸이 반쪽으로 갈라진 <반쪼가리 자작> 메다르도,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열두 살 때부터 나무 위에서 살아가는 <나무 위의 남작> 코지오, 육체가 없이 갑옷 속에서만 존재하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 등 세 명의 선조 이야기를 다룬 <우리 조상> 시리즈는 계몽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유럽 동화 메르헨의 환상적 형식과 내용을 빌어 오랜 세월 유럽 사회를 지배해 온 이분법적 사고체계를 극복하고 20세기의 다양성을 수용하고자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담긴 작품들이다.

<반쪼가리 자작>의
이탈리아판 표지1
(출처: amazon.it)

1952년 <우리 조상> 3부작 중 제일 먼저 발표된 <반쪼가리 자작>은 17세기 말 터키와의 전쟁에서 무모하게 적진으로 뛰어들다 날아온 포탄을 맞고 몸이 반쪽으로 갈라져 버린 귀족 메다르도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평범한 청년이었던 주인공은 반쪽이 된 후 피도 눈물도 없는 포악한 인간으로 변하여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반으로 갈라 죽이고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이런 반쪼가리 자작의 모습에 공포를 느낀 주민들은 크게 웃거나 노래하지도 못하게 된다.

<반쪼가리 자작>의
이탈리아판 표지2
(출처: amazon.it)

그러던 어느 날 메다르도는 순박한 양치기 소녀 파멜라를 보고 몸과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이는 것을 느낀다. 악의 화신 메다르도에게도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파멜라와 결혼해 그녀를 소유하려는 그의 계획은 전쟁터에서 죽은 줄 알았던 또 다른 반쪽이 돌아오며 위기를 맞는다.

뒤늦게 도착한 메다르도의 나머지 반쪽은 이번에는 선함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그는 어떠한 나태나 부정도 없는 완전한 선행을 실천할 것을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제 마을은 절대 악과 절대 선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한편 메다르도의 두 반쪽은 파멜라와의 결혼을 두고도 대립한다. 양쪽 모두 그녀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절대 악과 절대 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파멜라. 과연 그녀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연극 “반쪼가리 자작” 포스터 (2017, 2020)
(출처: playticket.co.kr)

인간의 신체가 반으로 갈라져 반쪽만 돌아다닌다는 비현실적인 설정은 <반쪼가리 자작>이라는 소설을 무대극으로 공연하려는 시도를 망설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를 감행한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극단 ‘잘한다 프로젝트’와 박성찬 연출이 그들이다.

박성찬 연출
(출처: news-paper.co.kr)

소설을 직접 각색하고 연출한 박성찬 연출은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무대 위에 살아 움직이게 할 방법으로 인형이라는 오브제를 도입한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에 등장하는 배우와 인형들
(출처: 연극 “반쪼가리 자작” 팜플렛)
연극 “반쪼가리 자작” 공연 사진
(출처: playdb.co.kr)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제작된 인형들은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 말과 당나귀, 염소와 오리 등을 대신한다. 특히 어린이극에서나 쓰일 법한 천으로 만든 메다르도의 인형은 단순한 형태와 부드러운 물성으로 메다르도의 갈라진 육체와 정신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공연 사진
(사진: 잘한다프로젝트)

또한 인형에서 배우로, 배우에서 다시 인형으로 옮겨가며 쉴 새 없이 변형되는 인간군상의 모습과 가면, 그림자극, 배우들의 아크로바틱 등 다양한 무대표현들은 칼비노 소설의 환상적 특징을 더욱 극대화시키며 관객에게 쉽고 친근하게 전달한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공연 사진
(출처: 문화뉴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선과 악이 혼재된 이런 불완전한 상태가 우리 인간의 본질임을 칼비노는 반쪼가리 자작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공연 사진
ⓒ극단 프로젝트하다 (photo by 김솔)

파멜라를 차지하기 위해 결투를 벌이던 메다르도의 두 반쪽은 서로를 칼로 찌르고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진다. 그리고 땅으로 흘러나온 피가 엉겨 붙으며 둘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의 다른 면을 극복해야 하는 청년 메다르도의 모습은 독자에게, 또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연극 “반쪼가리 자작” ⓒ극단 프로젝트하다

이탈로 칼비노는 <우리 조상> 3부작 이외에도 계속해서 소설의 새로운 표현 방법에 천착해 천체물리학과 환상을 접목시킨 <모든 우주만화>, 타로카드의 이미지를 서사의 모티브로 활용한 <교차된 운명의 성>, 기호학적 언어로 그린 지도책과 같은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발표하며 기발한 상상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를 인도하였다.

동화적 환상과 상상력, 이미지와 기호 등 새로운 창작기법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문제를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작가 이탈로 칼비노. 변화무쌍한 그의 작품세계를 무대에서 더욱 자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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