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아버지의 언어” 속으로.

– 연극 ‘킹스 스피치’, 감동적 성장 드라마로 포장한 존재의 비극 –

오재균 (배우, 극작가, 연출가)

우리에게 영화로 널리 알려진 ‘킹스 스피치’는 원래 연극으로 올려지기 위한 희곡으로 먼저 쓰였다. 하지만 왕실의 권위와 이미지를 실추시킬 염려가 있다하여 영국 왕실이 연극 제작을 금지시켰다. 그런데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불행했던 희곡은 영화로 먼저 제작 되었고, 이를 본 엘리자베스 여왕이 감동하여 연극 제작을 허락했다고 한다. 기사회생한 이 드라마는 그리고 드디어 한국 무대에서도 한국 배우들의 언어로 공간이동을 하게 되었다.

이미 영화로 꽤나 흥행을 했던 작품이라 줄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조지 6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드라마의 내용은 매우 단순하다. 타고난 성품이 유순하고 소심해서인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주인공 버티는 왕실 생활이 주는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한 강박증으로 어릴 적부터 언어 장애를 가지게 된다(원어에서는 주로 K와 Q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떠듬거리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KING과 QUEEN을 상징하는 기표로 사용된 듯 하다). 그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딸들에게 동화책 조차 제대로 읽어주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소시민적 가장의 모습과, 비록 정치권의 광대로 실권이 추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영국의 상상계와 상징계를 책임져야하는 정치인으로서의 뼈아픈 번뇌를 드러낸다. ‘정치는 말이 전부다’라는 속설도 있듯이 정치인에게 있어 언어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버티에게 연설문 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졌을지는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작품은 그러한 주인공 버티가 배우 지망생이자 언어 치료사인 라이오넬 로그(심지어 그의 성은 ‘LOG’다)를 만나서 온갖 번민과 노력 끝에, 자유분방하며 정치적 식견이 낮은 자신의 형 데이비드를 뛰어넘어 조지 6세로 거듭나는 과정을 제법 감동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작품은 주인공이 자신의 한계와 고통을 극복하고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다소 뻔한 성장 드라마로 보여진다.

하지만 이 작품의 내면을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우리는 본질이 규정된 채 탄생한 주인공 버티와 또 다른 주인공 라이오넬의 실존적 부조리를 마주하게 되면서 사뭇 씁쓸한 존재의 비극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을 스스로 우상학자라고 표현하는 후기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그는 프랑스 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 당했다)은 인간을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또한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이 세계를 ‘상징계’라는 단어로 표현하며 그 ‘상징계’를 지배하는 언어를 ‘아버지의 언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의 언어’라는 고정관념에 의해 교육 당하고 생각 당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그것을 거부하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히스테리와 강박증, 도착증 등 모든 정신 질환이 나타나는 것이다.

주인공 버티의 몸은 그 ‘아버지의 언어’에 반발했으나 그의 의식은 ‘상징계’ 속으로 들어가 안정되기를 원했으며 결국 갖은 노력으로 자신의 ‘실질계’를 잠재우고 ‘아버지의 언어’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말해 그의 몸이 그토록 거부했던 고정관념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과연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뜻하지 않게 왕비가 되어버린 그의 아내는 극중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왕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결혼했다”고… 그와 그녀의 딸들이 공주로서, 그리고 훗날 여왕으로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두렵다고. ‘아버지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계승한 조지 6세가 된 버티는 그의 입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것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만일 영국이 패배하고 독일이 승리했다면 과연 그것은 옳은 것이 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그의 승리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고 완성한 처칠의 승리일까? 모를 일이다.

반면 또 한명의 주인공인 라이오넬의 삶은 우리에게 훨씬 더 실질적으로 다가온다. 버티에게 있어 언어 장애를 극복하고 당당한 왕실의 후계자가 되어 ‘아버지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꿈이었다면 그로써 행복하든 아니든 어찌됐든 그는 꿈을 이루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을 그렇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셰익스피어가 곧 ‘아버지의 언어’였다. 그는 끊임없이 셰익스피어를 암송하고 셰익스피어의 언어로 오디션을 보지만 번번히 탈락한다. 이유는 그가 식민지 호주 사람이며 그래서 호주 사투리가 섞인 발음으로 감히 셰익스피어를 읊조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셰익스피어가 아닌가? 자신을 탈락시킨 오디션 심사위원들에게 그는 속으로 이렇게 외친다. “햄릿은 덴마크 사람이야!”…. 그가 느꼈을 사회구조의 벽은 실로 높았을 것이다. 그는 결국 ‘아버지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불행하게 했을까?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 뒤에 남겨진 ‘아버지의 언어’는 그를 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가 버린 것인가? 그것 또한 모를 일이다.

국내에서 초연이 된 이번 공연은 깔끔한 연출과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로 제법 웰 메이드한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나는 이 웰 메이드한 연극의 해피엔딩을 마냥 웰 마인드 하게 보지는 못한 것 같다. 이유가 뭘까? 그 이유가 작품 속 주인공들의 부조리한 상황, 즉 버티처럼 선택의 여지없이 태생적으로 주어진 부조리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며 세상이 정한 ‘아버지의 언어’ 속으로 들어가든, 아니면 라이오넬이나 라캉의 삶처럼 ‘아버지의 언어’로부터 파문 당하거나 버려져 반항과 방황의 삶을 살아가든 어쨌거나 그러하게 버텨내며 끝없이 바윗덩이를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존재의 무게감과 서글픔을 확인해서라고 말한다면 작품을 너무 비극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그냥 감동적 인간 드라마로 가볍게 즐기면 될 것을….. 어쩌면 이러한 생각이 드는 것도 나에게 각인된 내 ‘아버지의 언어’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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