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 (Faust)’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연재에 앞서

– 임야비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 독일 무대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으니

오늘은 배경이건 소도구건 마음대로 사용해 보자고.

크고 작은 천상의 조명들을 모조리 동원하고
별들도 얼마든지 사용하게나.

물, 불, 암벽은 물론 동물과 새들도 빠져선 안 되네.

비록 비좁은 가설무대 안일망정 창조의 온 영역을 재현해 놓고
알맞은 속도로 두루 거닐어보자고.

천국에서 현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기까지.

파우스트, 무대에서의 서연(序演)

드디어 파우스트라는 거대한 산 앞에 섰다.

셰익스피어라는 대양을 헤엄쳐 뭍에 올라 몰리에르, 로르카, 레르몬토프, 메테를링크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앞을 보니 거대한 괴테의 파우스트가 떡하니 길을 가로막았다.

초판본

2010년 TTIS에 셰익스피어로 ‘음악으로 읽는 연극’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괴테에 이르고 또 언젠가는 파우스트의 음악을 써야 할 각오를 했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연재 중 가장 힘든 시기가 될 거라는 예상도 했었다. 8월과 9월에 괴테의 비교적 짧은 희곡 ‘에그몬트’와 ‘토르콰토 타소’를 우선 연재하며 2달의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괴테 셰익스피어

괴테의 파우스트를 주제로 200년간 작곡된 작품의 수는 셰익스피어를 주제로 400년간 작곡된 음악의 수와 맞먹는다. 그런데 두 극작가가 수많은 작곡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방법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총 38편의 희곡으로 후대 작곡가들에게 풍부한 음악적 재료를 주었다면, 괴테는 파우스트 단 한 작품만으로 후대 작곡가들의 창작열을 고취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넓은 바다와 같고, 괴테는 홀로 우뚝 선 거대한 산과 같다.

셰익스피어를 연재할 당시(2010~2012년), 얄팍한 희곡 한두 권을 옆에 두고 관련 음반 대여섯 장을 들어가면서 글을 썼다. 매월 셰익스피어의 희곡 2~4개씩을 묶어서 연관된 음악을 소개하면 한 회 분량의 글이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준비 자체가 달랐다. 두툼한 파우스트 한 권에 연관된 음반을 모아보니 족히 70~80장이 넘었다. 괴테의 파우스트 한 작품만으로 몇 개월 치 연재의 분량이 나왔다. 게다가 파우스트는 연관된 음악은 그 수도 압도적이지만, 서양 음악사적으로 굵직한 곡들이 많기 때문에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다.

험준한 등반 같을 긴 글의 시작점에서 연재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파우스트 산’ 정복을 위한 긴 등반이 음악과 함께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작곡가별로 정리해 연재하는 방법. 가장 무난하고 깔끔하지만, 일반 클래식 음악 해설서와 다를 게 없다. 고전-낭만-후기 낭만-현대… 베토벤-슈베르트-베를리오즈-슈만-브람스-베르디-말러….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지긋지긋한 순서대로 파우스트를 연재한다면, 아마 가장 지루한 산행이 될 것이다.

연도별로 정리해 연재하는 방법. 시대에 따라 파우스트가 어떻게 인식이 되는지를 변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신기하게도 작곡가들이 가지고 있는 파우스트에 대한 이미지는 200년간 큰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작품의 수가 너무 많아서, 독자들의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파우스트의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순서대로 음악을 배열해 연재하는 방법. 독자들이 연재를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희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되짚어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음악이 유명한 몇 장면(라이프치히 지하 술집 장면,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 2부 5막의 심산유곡 장면 등)에만 편중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더불어 ‘파우스트적 이미지’만을 가지고 작곡한 음악들  때문에 분류가 모호해졌다.

파우스트, 메피스토펠레스, 그레트헨, 헬레나. 이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에 연관된 음악으로 각각 연재하는 방법. 재미있는 방법이나 두 주인공 또는 세 주인공이 함께 엮이는 음악들이 다수여서 적절치 않다.

크레센도

이렇게 연재 방법을 계속 고민하다가 문득 파우스트의 무대를 상상해보았다. 1부의 첫 장면은 파우스트의 작은 골방 서재에서 시작한다. 그러다가 파우스트의 행동반경이 이곳저곳으로 점점 넓어진다. 2부에는 배경이 아예 궁전이고, 결말에서는 장대한 천사들의 합창과 함께 주인공이 천국에까지 오른다. 파우스트의 무대 규모는 뒤로 갈수록 점점 커진다. 점점 커지게’를 뜻하는 음악 용어 크레셴도(Crescendo)와 구조가 비슷하다. 기어이 좋은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파우스트를 음악화한 모든 작품을 작은 규모에서부터 큰 규모로 연재하면 매우 특별한 점층 구성이 될 것이다. 우선 연주자가 1명 또는 2명인 작은 규모의 곡에서부터 연재를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연주자가 10명 이하인 실내악곡을 소개하고, 이후 100명 정도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관현악곡과 교향곡이 뒤를 잇는다. 후반부에 이르러 관현악에 성악까지 곁들인 오페라를 다루고, 연재 마지막에는 총 1000명이 무대 위에 서는 장대한 곡으로 마무리 짓는 틀을 잡았다. 이런 식으로 음악을 배치하여 연재하면, 작은 골방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영지의 영주가 되는 파우스트의 ‘점점 커지는’ 여정과 음악적 규모의 크레셴도(Crescendo)가 절묘한 공명을 일으킬 것이다.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나름 특이하고 흥미로운 연재 계획이라고 자신한다. 이번 연재가 TTIS 독자분들 그리고 파우스트와 연극을 사랑하는 모든 분께 조금이라도 유익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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