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은

<12인의 성난 사람들>

Twelve Angry Men

연극평론가 고수진

1954년 미국 CBS 방송국의 드라마작가였던 레지널드 로즈는 배심원으로 선발되어 한 달 동안 실제 재판에 참여했다. 전원 백인 남성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로즈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는 시청자들이 들여다보지 못하는 배심원실 내부의 모습을 극본으로 써 내려갔다. 존속살해사건 평결을 맡은 배심원 12명의 토론과정을 다룬 그의 작품은 1954년 9월 20일 밤, CBS TV 드라마시리즈 “웨스팅하우스 스튜디오 원(Westinghouse Studio One)”에서 <12인의 성난 사람들(Twelve Angry Men)>이라는 제목으로 60분 동안 생방송되었고, 흥행에 크게 성공하며 1955년 에미상에서 연출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CBS의 TV드라마 (출처:idmb.com)
레지널드 로즈(1920 ~ 2002)
(출처:idmb.com)

드라마가 방영된 다음 해인 1955년, 각본가 셔먼 L. 서겔(Sherman L. Sergel)은 로즈의 TV 대본을 남성이 연기하는 <12 Angry Men>과  여성이 연기하는 <12 Angry Women> 두 가지 버전의  3막 희곡으로 각색해 드라마틱 퍼블리싱 컴퍼니에서 출판했다. TV드라마를 주로 써 오던 로즈는 각색된 희곡의 무대 상영권을 출판사에 넘겼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미국에서는 서겔의 각색본이 유일한 공연 라이센스를 가지게 되었다.

셔먼 L. 서겔의 각색본들 (출처: amazon.com)

한편 레지널드 로즈는 1957년 자신의 드라마를 시나리오로 개작해 동명의 영화로 제작했다. CBS에서 연출가로 활동하던 시드니 루멧이 감독을 맡고, 공동 제작자이기도 한 헨리 폰다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영화는 작품성을 인정받아 그해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7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1957년 영화 포스터 (출처: 위키백과)
제작과 주연을 맡은 헨리 폰다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58년 이후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원작자인 레지널드 로즈 또한 자신의 작품을 무대 상연을 위한 2막의 희곡으로 각색했다. 로즈가 직접 각색한 희곡은 1964년 런던 퀸스 시어터에서 공연되었으며 이듬해 사무엘 프렌치 런던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TV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리메이크되었고 배심원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위해 학교에서도 자주 공연되었다.

1964년 런던 공연의 연출을 맡은 마가렛 웹스터 (출처:findagrave.com)
사무엘 프렌치 사에서 출판된 레지널드 로즈의 각색 희곡 (출처:amazon.co.uk)

1995년, 미식축구 스타 O,J. 심슨은 살인사건 재판에서 배심원 평결에 의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인종적으로 치우친 배심원단의 구성이 배심원제도 자체에 대한 논란으로 번지던 1996년, 저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는 런던의 브리스톨 올드빅 시어터에서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무대화했다. 평소 부조리적인 연극스타일로 유명했던 핀터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고전적인 법정극에 정치적 활력을 불어넣으며 평단의 지지를 받았고, 대본으로 사용된 로즈의 희곡은 30여 년만에 다시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해럴드 핀터와 그가 연출한 포스터
(출처: alchetron.com / haroldpinter.org)
1996년 Methuen사에서 출판된 희곡
(출처: amazon.com)

2000년대에도 <12인의 성난 사람들>에 대한 변주는 계속되었다. 2003년 영국의 코미디언이자 연출가인 가이 마스터슨(Guy Masterson)은 에딘버러페스티벌 프린지에서 12명의 배심원을 코미디언으로 캐스팅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그의 작품은 진지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드라마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유연하고 전복적인 시도로 관객을 불러모았고, 호주와 뉴질랜드 등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멜버른 그린 어워드’에서 연출상 등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가이 마스터슨과 그의 공연 포스터
(출처: theatretoursinternational.com)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연극의 중심부인 브로드웨이에서는 스튜디오 원의 TV 드라마가 방영된 지 50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이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뉴욕의 아메리칸에어라인 극장에서 라운드어바웃 시어터 컴퍼니(Roundabout Theatre Company)가 공연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300회가 넘게 롱런하며 2005년 ‘드라마 데스크 리바이벌 작품상’을 수상했지만 2002년 세상을 떠난 레지널드 로즈는 자신의 작품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끝내 보지 못했다.

<Twelve Angry Men>의 브로드웨이 포스터 (출처: worthpoint.com)
라운드어바웃 시어터의 2008년 공연장면 (출처: stage-door.com)

2016년 극단 산수유는 대학로 미마지아트센터 물빛극장에서 김용준이 번역한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공연했다.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은 천정이 매우 낮고 무대와 객석의 거리도 가까웠다. 연출을 맡은 류주연 연출가는 1950년대 미국이라는 원작의 설정을 한국 실정에 맞게 각색하고 12명의 배심원 중 3명을 여성이 연기하게 했다. 공연장이 협소한 만큼 배심원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움직임에는 제약이 많았지만, 진실에 가 닿기 위해 합리적 의심을 멈추지 않는 그들의 열띤 토론은 객석을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흡입력 있는 연출과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가 빛을 발한 극단 산수유의 공연은 2016년 ‘월간 한국연극 선정 공연 베스트7’에 선정되었으며, ‘공연과 이론 작품상’, 제4회 ‘이데일리문화대상 연극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 2019년 공연 포스터
/ⓒ김솔(출처: 극단 산수유)

연극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칼로 아버지를 찔러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16세 소년의 유,무죄를 가리기 위해 모인 12명의 배심원들이 단 몇 시간 동안 벌이는 논쟁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연극이다. 재판에 무작위로 불려나온 배심원들은 변호사와 검사의 변론과 심문이 끝나고 덥고 좁은 회의실에 갇혀 투표를 진행한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유죄가 나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결과는 11:1로 한 명이 무죄에 표를 던진다.

극단 산수유 공연 장면 (출처: 극단 산수유)

8번 배심원은 누군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에 앞서 적어도 한 번쯤은 합리적 의심을 해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죄를 주장하노라 말하며 소년의 무죄를 입증하려 애쓴다.

극단 산수유 공연 장면 (출처: 극단 산수유)

극이 진행될수록 그의 합리적 의심은 힘을 얻고 결국 깊은 고민 없이 유죄에 표를 던졌던 나머지 배심원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편견, 아집에서 벗어나 증거에 입각한 합리적 의심을 받아들이게 된다. 작품 속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합리적 의심’은 민주주의의 효용 가치와 함께 이 작품을 강하게 지탱하는 힘으로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그 주제 의식을 유지하고 있다.

극단 산수유 공연 장면 (출처: 극단 산수유)

그렇다면 2020년 현재의 우리는 어떠한가. 비단 재판정이 아니더라도 확증편향에 기대 누군가에게 합리적 의심의 과정 없이 마음속으로 유죄를 선고하고 있지는 않은가.

1957년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

1957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9번 배심원은 만장일치로 무죄를 이끌어 낸 8번 배심원에게 다가가 이름을 묻는다. 8번 배심원이 ‘데이비스’라고 말하자 9번 배심원은 자신의 이름은 ‘맥카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헤어진다. 그런데 나머지 10명의 배심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중에 혹시 나의 이름이 있지는 않을까? 익명의 군중이 아닌 주체적 개인을 요구하는 흑백 화면 속 맥카들의 질문에 나는,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극단 산수유 <12인의 성난 사람들>의 배심원들 ⓒ김솔(출처: 극단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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