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살아있으라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Réparer les vivants

연극평론가 고수진

열아홉 살 청년 시몽 랭브르는 친구들과 새벽 서핑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코마상태에 빠진다.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몽의 부모에게 의료진은 뇌사자 장기기증을 권하고, 자는 듯 숨을 쉬고 있는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 두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사망에서 이식까지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아직 뛰고 있는 시몽의 심장 주위로 사람들이 모인다.


마일리스 드 케랑갈(1967 ~ )
(출처: oblongbooks.com)

2000년, 소설 『구름 낀 하늘 아래를 걷다』로 데뷔한 프랑스 작가 마일리스 드 케랑갈(Maylis de Kerangal)은 2010년 발표한 『다리의 탄생』으로 메디치상과 프란츠 헤셀상을, 2012년 『동쪽으로 뻗은 접선』으로 랑데르노상을 수상한 뒤 2014년 발표한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오랑주 뒤 리브르상을 비롯해 세계 10여 개 문학상을 받으며 프랑스 문단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다. 특히 뇌사와 장기이식을 소재로 한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미국 번역판 『The Heart』가 빌게이츠의 여름독서목록에 오르며 더욱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미국에서 번역된 『The Heart』
(출처: booksvooks.com)

심장병을 앓았던 아버지와 심혈관계 외과의사인 오빠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 마일리스는 불의의 사고로 죽음에 이른 청년과 아들의 장기기증을 결정해야 하는 부모, 기증자와 이식자의 연결을 도와주는 이식 코디네이터, 수술을 맡은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이식에 대한 희망으로 삶을 이어가는 이식대기자 등 뇌사와 장기이식에 직면한 인물들의 다층적인 심리상태를 24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에 세밀하게 담아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안톤 체홉의 희곡 <플라토노프>
(출처:scribd.com)

소설의 제목 <Réparer les vivants>은 체홉의 미완성 희곡 <플라토노프>의 대사에서 가져왔다. 총에 맞아 죽은 주인공 플라토노프의 주검을 앞에 두고 보이니체프가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니콜라이?” 그러자 의사 트릴레츠키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자들은 땅에 묻고 살아있는 자들은 고쳐야지.”

소설에서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의 방에 붙어있는 이 문구에 대해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수선”이라는 단어가 “치유”보다 그녀의 프로젝트에 더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인간존재의 실용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원제 그대로 번역된 『MEND THE LIVING』
(출처: amazon.com)

2016년 제73회 베니스영화제 호라이즌 섹션에서는 마일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카텔 퀼레베레가 감독한 영화 <Réparer les vivants (Heal the Living)>이 상영되었다.

영화 <Réparer les vivants>의 포스터
(출처: unifrance.org)

영화 <Réparer les vivants>의 영어판 포스터
(출처:cinemaclock.com)

영화는 장기 공여자 시몽과 이식대기자 클레르의 삶을 교차해 보여주며 아름다운 청춘의 한 가운데서 두근거렸던 열아홉 청년 시몽의 심장이 병으로 사그라져가는 50대 여성 클레르의 삶으로 어떻게 옮겨가 되살아나는지를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영화 <Réparer les vivants>의 한 장면
(출처: lueurdesprit.com)

영화 <Réparer les vivants>의 한 장면
(출처: imdb.com)

영화 <Réparer les vivants>의 한 장면
(출처: radio-canada.ca)

심장이식을 통해 생명의 불꽃을 이어나가려는 시몽과 클레르, 두 사람의 가족과 의료진들의 노력을 담은 영화 <Heal the living>은 단순한 의학드라마를 넘어 삶의 가치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 냈다는 평을 받았다.

엠마누엘 노블레 (1975 ~ )
(출처: fr.wikipedia.org)

프랑스 배우 엠마누엘 노블레(Emmanuel Noblet)는 2014년 장기기증을 소재로 한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소설에 관한 기사를 읽고 이 작품을 연극으로 각색하기로 마음먹었다. 쌍둥이 미숙아로 태어나 중환자실에서 생을 시작한 노블레의 원초적 경험이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연극 <Réparer les vivants> 포스터
(출처: parismatch.com)

그리고 일 년 뒤인 2015년, 아비뇽페스티벌에서 그가 선보인 연극 <Réparer les vivants>는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한 사람이 연기하는 1인극이었다.


서핑보드 위에서 헤엄치는 시몽을 연기하고 있는 엠마누엘 노를레
(출처: theatredurondpoint.fr)

의료진을 연기하는 엠마누엘 노블레
(출처 : theatredurondpoint.fr)

각색에서 연출, 연기까지 혼자 해낸 엠마누엘 노블레는 배우 한 사람의 몸을 통해 가슴 벅찬 사랑의 설렘과 죽음에 대한 공포, 영원한 이별을 앞둔 가족의 슬픔, 장기이식으로 기사회생한 환자의 기쁨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심장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며 2017년 몰리에르 1인극상을 수상했다.

수술 장면을 연기하는 엠마뉴엘 노블레
(출처: youtube.com)

노블레의 모노드라마 <Réparer les vivants>은 2019년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국내 포스터
(출처: 인터파크)

우란문화재단이 기획하고 연출가 민새롬이 연출한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손상규와 윤나무의 더블캐스팅으로 배우 혼자서 16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원작의 감동을 이어 갔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의 배우 손상규(위), 윤나무(아래)
(출처: 인터파크)

텅 빈 무대에 놓인 것은 작은 탁자 하나뿐. 탁자는 스크린의 배경에 따라 서핑보드가 되기도 하고 수술대가 되기도 한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장면
(사진: 우란문화재단·프로젝트그룹 일다)

심장이식까지 남은 시간이 무대 뒷면에 붉은색 LED로 표시되며 긴박함을 전하는 동안 배우는 때로는 파도를 타는 서퍼로, 때로는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로, 그리고 생과 사의 경계를 건너는 환자로 분한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장면
(사진: 우란문화재단·프로젝트그룹 일다)

특히 배우의 연기와 음향, 조명효과만으로 심장이식과정을 표현한 수술 장면은 장기이식이 신념과 철학의 문제일 뿐 아니라 실체적 의학으로서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는 행위임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공연장면
(사진: 우란문화재단·프로젝트그룹 일다)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조금이라도 차분하게 숨죽인다면, 그들의 심장이 남아 있는 생명을 다 같이 펌프질하고 요란스럽게 두드려 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마치 민감 센서가 방실 판막이나 반월 판막에 설치되어 그로부터 초저주파를 발산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파동은 공간을 질주하고 물질을 관통하여 확실하고 정확하게 일본에, 세토 내해에, 어떤 섬에, 야생의 바닷가에, 그 목재 오두막에 가 닿고, 거기에서는 인간의 심장 박동을 정리하는 작업이, 온갖 곳을 돌아다녔을 사람들에 의해 등록되거나 기록된, 전 세계에서 모아들인 심장의 형적을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중에서-
데시마섬에 있는 ‘심장소리 아카이브(Les Archives du Cœur)’
(출처:japantravel.com)

소설 속에는 시몽의 부모 마리안과 숀, 그리고 어린 여동생 루, 세 사람이 부둥켜안고 서로의 심장소리를 느끼며 슬픔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의 심장 박동은 파동의 형태로 일본 데시마섬에 있는 ‘심장소리 아카이브(Les Archives du Cœur)’에 가 닿는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Christian Boltanski)
(출처: khan.co.kr)

세계 각지 사람들의 심장 박동 기록을 영구 보관하고 있는 일종의 박물관인 ‘심장소리 아카이브’는 아카이빙과 설치 작업을 통해 삶과 죽음을 탐구해온 파리 출신의 현대미술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설치작품으로 방문자들이 자신의 심장소리를 직접 녹음해 보관할 수도 있다.

수집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치
(출처: benesse-artsite.jp)

캄캄한 복도에서 들리는 심장박동 소리에 맞춰 전구가 깜빡이는 이 공간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심장이 뛰어 한 사람을 살아가게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그랬던 것처럼.

심장소리 아카이브의 내부모습
(출처: benesse-artsite.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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