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3)

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음악으로 듣는 연극 – 파우스트’의 첫 회는 2020년 10월이다.  장장 1년 6개월간 연재했다. ‘1인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시작하여 ‘2인’, ‘8인’, ‘기십 명’과 ‘일이백 명’까지 오는데 장장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제 정상 정복을 코 앞에 두고 충전을 위한 마지막 캠프를 친다. 앞으로 몇 회 정도는 쉼 없이 오르느라 지나쳤던 ‘파우스트 음악’을 야무지게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2022년 4월의 부록1에서 비에니아프스키, 알라르, 비와탕, 사라사테의 ‘2인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를 분석했고, 5월의 부록2에서는 파니 멘델스존 헨젤의 ‘기십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를 되짚었다. 이번 부록3은 등반 초기 즉, ‘1인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놓쳤던 샤를 발랑탱 알캉(Charles-Valentin Alkan; 1813~1888)의 ‘그랜드 소나타’부터 살펴보겠다.

 

샤를 발랑탱 알캉(Charles-Valentin Alkan; 1813~1888)

 

유대계 프랑스인인 알캉은 특유의 은둔적 성격 때문에 동시대에 활동한 리스트나 쇼팽만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다. 그나마 생전에 이름을 알린 건 비루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 얻은 명성 뿐이고, 그가 작곡한 피아노 작품들은 거의 회자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전문 피아니스트들조차 ‘연주 불가’라며 손사레를 쳤던 초절 테크닉 때문이었다.

묻혀 있던 알캉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피아노 연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연관이 깊다. 20세기 중반, 새로운 레퍼토리를 모색하던 정상급 피아니스트들이 알캉을 발굴했고, 이후 음반을 통해 클래식 음악 애호가 사이에 알캉 열풍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중 ‘Grande Sonate – Les Quatre Ages(그랜드 소나타 – 인생의 네 시기) op. 33’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유는 가장 크고, 굉장히 어렵고, 매우 철학적이며, 음악에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Grande Sonate ‘Les Quatre Ages’ op. 33 그랜드 소나타 ‘인생의 네 시기’의 악보 표지

 

1848년에 완성한 그랜드 소나타는 연주 시간 40분이 넘는 대곡으로 총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피아노 소나타다. ‘인생의 네 시기’라는 제목에 맞춰 1악장은 ‘20대’, 2악장은 ‘30대’, 3악장은 ‘40대’, 4악장은 ‘50대’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알캉은 각 악장의 템포로 네 시기의 깃발을 세우는데, 1악장 ‘20대’는 어디로 튈지 모를 청춘을 매우 빠른 템포로 묘사하며, 2악장과 3악장을 거치며 조금씩 느려진 템포는 마지막 4악장 ‘50대’에서 ‘Extremement Lent (극히 느리게)’로 주저앉는다.

이중 우리가 분석할 부분은 2악장 ‘30대’다. 알캉이 적어 놓은 연주 지시어는 ‘Quasi-Faust’ 즉, ‘파우스트 풍으로’다.

 

Grande Sonate ‘Les Quatre Ages’의 2악장 ‘30대(30 ans)’의 첫 부분. 우측 위의 ‘Quasi-Faust(파우스트 풍으로)’라는 지시어가 인상적이다.

 

2악장은 Assez vite(충분히 빠르게) 템포로 시작하는 소나타 형식의 악장이다. 이 악장은 알캉의 피아노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테크닉을 요구하는 악장이자, 동시에 음악 및 서사 구조상 걸작으로 칭송되는 악장이다.

첫 부분은 올림 라단조(d# minor)로 파우스트를 묘사한다. 도약하는 밝음과 꿈틀거리는 어둠이 육박전을 벌이며 질주한다. 파우스트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강렬한 터치로 묘사한 부분으로, 듣기만 해도 손가락이 꼬일 정도로 현란한 음색이 기관총탄처럼 쏟아진다. 잠시 포화가 걷히고 이어지는 느린 주제는 그레트헨이다. 파우스트의 주제가 ‘광란의 리스트’라면 그레트헨의 주제는 ‘여린 쇼팽’이다. 괴테 원작처럼 두 주제는 부드럽게 화음을 이루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섞이기도 하지만 속사포 같은 템포와 넘어질 듯한 불안함 때문에 어둡고 비극적이다.

이어 알캉이 직접 ‘Diabolique (악마)’라고 악보에 적어 놓은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가 등장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제는 파우스트 주제의 역위(逆位) 즉, 주제 멜로디 음표를 거울 보듯이 뒤집은 음형이다. 알캉의 연출 의도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성과 속, 늙음과 젊음, 진리와 허무 사이에서 갈등하는 학자 파우스트의 음각을 그대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 새긴 것이다. 이 ‘파괴적 결합’은 전무후무한 ‘8성(聲) 푸가’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느린 4성 푸가도 연주하기 힘든데, 성부가 두 배인 8성 푸가를 속주로 쳐내야 한다. 수학적 질서에 얹힌 혼돈이자,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다. 푸가 부분부터 종결 마디까지 청자가 느끼는 감정은 벅찬 감동이라기보다는 소름 끼치는 경악에 가깝다.

 

알캉과 리스트

 

‘인생의 네 시기’는 작곡가로서 걸작을 남기고 싶은 야망 그리고 연주자로서 초절 기교를 뽐내고 싶은 욕망이 합쳐진 결정체였다. 그런데 알캉은 왜 이 야심작의 2악장 ‘30대’에 파우스트를 삽입했을까? 이 곡을 작곡할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알캉은 자신의 예술적 번민을 파우스트의 고뇌에 대입하고, 자신의 현란한 피아노 테크닉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입하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입은 3년이 넘는 파우스트 연재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작곡가 리스트와 동일한 기전이다. 리스트는 ‘파우스트 교향곡’, ‘메피스토 왈츠’ 등 수많은 파우스트 관련 음악을 쓰고 직접 연주까지 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음악이 파우스트와 같은 걸작이 되길 원했고, 작곡가 또한 괴테의 반열에 오르고 싶었을 것이다. 리스트처럼 작곡과 연주를 겸했던 알캉도 마찬가지였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30대 알캉이 도전해야만 하는 고산준령(高山峻嶺)이었다. 그렇게 괴테로 빙의한 30대 알캉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무대가 아닌 오선지 위에 올려놓았고, ‘그랜드 소나타’가 영원불멸의 비극 옆에 나란히 놓이길 염원했을 것이다.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연주한 알캉 피아노 음반

 

알캉의 피아노 소나타 ‘인생의 네 시기’의 2악장 ‘파우스트처럼’은 파우스트를 소재로 삼은 모든 음악 중 가장 공격적이다. 세 주인공의 파괴적인 결합을 듣다 보면 ‘피가 끓기’보다는 ‘대량 출혈’을 느낄 것이다. 추천 음반은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하이페리온(hyperion) 레이블에서 1994년에 녹음한 연주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우연인지, 녹음 당시 피아니스트 아믈랭은 30대 중반 최전성기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s9RthqXGZ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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