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배우 장용철이 만난 풍경_ 연극과 사람 7호

선배님,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하신 거예요?

 

글_장용철 (극단 작은신화, 좋은희곡읽기모임)

 

유명한 희곡을 각색한 2인극 공연을 앞두고 우리 두 사람은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시작되는 연습실, 늘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습니다. 내 상대배우는 이제 막 대학로에 도착해서 생소한 2인극을 경험하는 초년생이었는데 그날도 우린 똑같은 장면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배우도 연출도 무척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녀는 거트루드였고, 나는 킹 클로디어스였습니다.

 

장면의 마지막 한 컷은 클로디어스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고, 거트루드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나를 정면으로 올려다보는 장면인데, 연출자는 연거푸 주문을 외쳤습니다. 좀 더 야하게! 더 리얼하게! 더 진짜처럼!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진 후배를 위해 선배인 내가 연습을 멈춰야만 했습니다. 우리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합시다! 라고 제안을 하고 거트루드와 나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시원한 공기가 우리를 숨쉬게 하였습니다. 세상은 우리 등장인물의 내면과는 상관없이 화사했습니다.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연습실로 들어가서 곧바로 같은 장면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우리 배우들은 연습실에서 단 두 사람을 목격합니다. 상대배우와 연출자. 이때 상대배우와 소통이 잘 되고 관계가 좋아야하고, 그 다음으로 연출자와의 관계를 범우주적으로 잘 만들어야만 합니다. 창작의 고통이 꿀맛인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상대배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비교적 부드럽게.

 

<그러니까 말이야. 생각을 하면 할 수록 더욱 곤란한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거야. 작업할 때 연출자와 대화가 잘 되고 마음이 잘 맞아야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니가 많이 부담을 갖고 있어서 더 힘든 것 같아. 낯선 공간에서 급작스럽게 맞닥뜨리는 낯선 상태란 늘 우리 배우들을 쪼그라들게 만들지, 이때 차라리 생각을 없애거나, 전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구. 우리 전혀 엉뚱한 방법을 한번 찾아볼까? 키스를 하는 방법 말고 뭐가 있을까?

 

자, 소리를 들어보자! 내 몸에 귀를 대고 진짜로 들어보는 거야. 사람의 피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집중하는 거다. 몸의 바깥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음 멈춘 채로, 몸의 안쪽에 설계된 혈관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몰두한다. 혈관을 통해 무엇이 지나가는지 우린 이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들어본 적 없을 거다. 그리고 설마 무슨 소리가 들릴 거라곤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데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소리를 내고 있을 거야. 움직이는데 소리가 없는 것은 오직 마음 뿐일까. 아니다, 사실 마음이 움직이는 만큼 온도가 변하고, 공기가 진동하기 때문에 분명히 어떤 소리가 탄생할 거다. 우리가 듣지 못하는 소리도 상당하겠지. 상대방의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는 그것을 향하고 있는 내 속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우리 한번 시도해보자. 이제 곧 연습실로 들어가서 아무런 설명없이 그저 주어진 상황으로 쳐들어가자. 뭘 더 생각할 필요 없이 우린 그저 마주 선다. 똑바로. 우리는 서로를 잠시 지켜본다. 작품에 등장하는 성인남녀 두 사람은 이미 지나간 무엇을 돌이키고 있는 지도 모르며, 무엇인가 먼 미래를 예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그저 어떤 사람의 몸을 잘 듣는 일에 충실하면 되는 거다. 너는 천천히 내 앞에서 작아진다. 너는 나를 감각한다. 나는 너의 감각을 느낀다. 내 앞에 너는 무엇이 되고 만다. 나를 천천히 올려다 본다. 나는 너를 천천히 내려다 본다. 모든 동작은 우선 네가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하면 된다. 시작점이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 지금 우린 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고, 연습실에 들어간 다음에야 인물의 마음을 일으키고 있다면 그건 금방 들켜버리니까 어쩌면 연출자는 연습할 기분을 다 망쳐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는 연습실 문을 들어서기 전에 끝내야한다. 자, 이제 마음의 준비를 다했다면 우린 연습실로 들어가서 아무런 말도 없이, 생각없이 조용히 자리 잡고 기다린다. 연출자는 신호를 줄 것이다. 그 신호는 아주 단순하다. “자, 배우들 준비되었으면 시작해! 시작!” 이렇게 간단할 것이다.

 

연출하는 사람은 우리보다 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그 고민은 아마도 작품 전체적인 면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구조적이고 입체적이며 깊이도 다를 것이며, 우리 배우들이 제발 빨리빨리 장면의 목표를 완성해주기를 원하고 있을 거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을 쓰윽 본다. 우리의 눈동자를 쓰윽 본다. 저 배우가 지금 상태가 어떤지. 오늘은 잘 해낼 것 같은지. 그리고 조금 기다려준다. 우리는 연출자의 그 심정을 잘 이해하면 된다. 배우가 ‘연출’ 한번 해보면 금방 깨닫는다. 배우들이 가끔씩은 정말이지 얼마나 답답한지를 알게 된다. 연출가도 ‘배우’ 한번 해보면 곧 깨닫는다. 아, 저 연출님은 왜 저렇게 급하실까. 왜 기다려주지 못할까. 배우를 이렇게 닥달하고, 면박 주며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고 자신없게 만들면서, 금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를 잘할 수 있기를 바라는 아주아주 어처구니없는 사람일 수가 있다니? 하고 말이다.>

 

그녀는 내앞에 똑바로 섰습니다. 나는 그녀가 앉은 바로 맞은편에 두 팔을 짜악 벌리고 섰습니다. 천천히 그녀는 내 턱밑으로 자기 옆얼굴을 접촉합니다. 그러다가 이내 한쪽 귀를 밀착시켜 내 앞가슴을 스치며 내 몸의 혈관을 따라 밑으로 밑으로 흐릅니다. 나는 그녀가 내 몸의 안쪽에 흐르는 소리를 잘 듣고 있다고 믿습니다. 눈을 감고, 그녀는 왼쪽 오른쪽 귀를 번갈아가며 내 몸에서 흐르는 소리에 집중합니다. 어느새 무릎 꿇은 자세로 낮아지면서 여전히 내 몸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어떤 작은 소리에 그녀는 몰두합니다.

 

“좋아요! 너무 좋아요!” 라는 연출가의 탄성을 듣자마자 우리는 거기에서 멈추었습니다. 서로를 쳐다보며 아무도 모르게 씨익 웃었습니다. 연출가는 다시 말했습니다.

 

“너무 좋아! 너무 근사하고 너무 야하고 멋지네요! 아니 선배님, 도대체 나가서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왜 갑자기 이렇게 달라진 거예요?”

 

나는 조용히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냥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어. 그 뿐이야.”

 

배우란 아주 투명하고 얇은 유리잔처럼 연약합니다. 무엇인가 보여줘야만 하는 서글픈 운명입니다. 자신의 단점을 과감하게 노출할 줄도 알아야하고, 얼른 그걸 고치면 아무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장착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이 가난함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야한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그 방법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는 어찌보면 미련해보일 정도로 가여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지나왔던 이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만하는 갸륵한 존재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에 겪었던 연습실 풍경 하나를 되새기면서 또다른, 똑같은,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세요. 새해만복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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