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마방진 <TEDDY DADDY RUN(테디 대디 런)>

글_홍혜련

 

 

이번 연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은 세상의 편견을 벗겨내는 작품들을 올리는 것으로 일찍부터 화제를 불러 모았다. <테디 대디 런>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공연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코피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코피노(Kopino). 코리안(Korean)과 필리피노(Filipino)의 합성어로, 한국인과 남성과 필리핀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를 가리킨다. 이 작품을 위해 작가 이세희는 직접 필리핀 마닐라를 방문해 2주간 코피노 열 가족을 만나 취재했다고 한다. 진정성 있는 소재인 데다 독특한 무대 언어로 정평이 난 마방진이라 하니 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드디어 공연 시작. 아기자기한 무대에 조명이 비치고 마닐라 거리를 질주하는 듯한 스펙터클한 영상 위로 감각적인 음악이 오감을 깨웠다. 그와 함께 관객들의 어깨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1부 윤서. 10대 청소녀인 윤서는 아빠에게 영어를 하는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아 버렸다. 문자메시지로 온갖 욕을 퍼부었는데 알고 보니 아빠의 애인이 아니라 아빠의 다른 딸에 욕을 쏟아 붓고 있었다. 둘은 욕으로 시작했지만 이 역시 말인지라 말을 주고받는 사이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이 오면 비밀을 말해 주겠노라고 미래에 대한 오묘한 약속까지 하는 사이가 된다. 어느덧 세월이 지나 엄마는 아빠와 이혼하고 미국으로 가 딴 사람이 된 듯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방학을 맞아 윤서는 엄마만 미국에 두고 필리핀에 사는 아빠를 만나러 가 꿈같은 일주일을 보낸다. 하지만 미국으로 되돌아가는 비행기가 결항되는 바람에 다시 아빠의 집으로 향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빠의 집은 엉망이 되어 있고, 아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로즈라 소개하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로즈가 자기를 왜 도와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사라진 아빠를 찾는 것이 먼저다. 테디인가 뭔가 하는 놈이 아빠를 잡아 갔다고? 둘은 이제 테디 아니, 대디를 찾아 모험을 시작한다.

이렇게 윤서와 로즈(인 줄 알았던 니나)와 함께 관객인 나의 마음도 두둥실 떠올라 필리핀 마닐라 거리를 뛰어다녔어야 좋으련만, 그러지 못하고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내 자리에 그대로 가라앉고 말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게다가 1부 격인 윤서의 이야기가 끝나고 2부에서 본격적으로 로즈, 아니 이제 진짜 이름이 밝혀진 니나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앞에서 본 것과 똑같은 사건이 한국 딸에서 코피노 딸로 관점만 바뀌어 또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여 더욱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니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눈물이 난다”라고 했다. 이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공연 서사의 중심인물은 니나다. 그렇다면 윤서는? 윤서는 공연의 시작을 여는 인물이다. 게다가 공연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마 한국 딸 윤서라는 거울을 통해 코피노 딸 니나가 처한 현실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어 똑같은 사건을 겪는데도 아이의 입장에 따라 이야기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 주려 한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윤서의 이야기를 니나의 이야기 앞에 배치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을 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긴 시간 이어지는 윤서의 이야기 속에서, 윤서가 왜 그렇게 아빠를 찾아 그 무서운(윤서는 이 거리에서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마닐라의 밤거리를,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관객은 이미 눈치 챘지만) 여자아이와 헤매며 다니는지 정당한 이유를 부여받지 못한 채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 틈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아빠가 사라졌는데 응당 찾아다니는 것이 딸의 도리,라는 것이 윤서의 동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니나의 이야기에서 윤서는 부자 한국인 딸로 강조된다. 이 역시 니나가 처한 현실을 더욱 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대비는, 남들 눈에는 위험하기 그지없을지라도 내가 나고 자란 마닐라의 팜팡가 거리를 사랑한다는 니나의 외침을 공허하게 만들어 버린다.

풀어야 할 숙제임에도 외면받고 있는 코피노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작가와 연출, 그리고 창작진의 마음에 진정성이 듬뿍 담겨 있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심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게만 풀어내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곳곳에서 엿보였다. 이 글 앞머리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공연의 무대와 조명, 영상, 음악은 상당히 화려해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여러 극중 인물과 마닐라 곳곳의 거리를 표현하려 한 것도 꽤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관객인 나의 마음은 무대 예술을 경험할 때 응당 기대하는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겪지 못하고 그저 그대로 이 세상에 머무르고 말았다. 윤서는 아빠, 엄마는 다 잊어버리고, 알고 보니 자매인 니나와 함께 마닐라 밤거리를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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