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창작집단 쓰리랑카타이거 <알고리즘>

글_김충일(연극 평론가)

 

 

겨우내 핼쑥해진 햇살이 짙은 미세 먼지에 가려져 연회색 빛으로 바뀐 갑진년(甲辰年) 입춘의 오후. 대흥동 소극장 고도 앞엔 몇 몇의 청춘들이 두 입술에 물린 담배를 피우며 사랑과 미움의 욕망을 태우려는 듯 엇갈리는 말들을 섞고 있다. 공연 시작 10분 전 객석에 앉아 흐릿한 불빛 속에서 검은색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쓰여 진 <알고리즘>이란 돌발적인 팜프렛을 들여다본다. 눈을 들어 다운·업 스테이지를 보니 조명 포커싱의 유무에 따라 5대의 삼각대에 스마트폰이 설치되어 있고, 붉은 빛의 조명을 받으며 세 벽의 아래엔 수십 개의 풍선들이 흩어져 있다, 마치 곧 터져버릴 사람의 몸속에 꽈리를 틀고 있는 욕망의 송이들처럼…

우리 인간은 과거부터 그려온 ‘빨간 신세계’를 꿈꾸며 삶이란 무대 위에 살고 있는 욕망하는 존재가 아닐까? 인간은 그 욕망으로 인해 자아와 세계, 주체와 현실이 서로 뒤섞이는 중간지점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현장 속에는 욕망과 사실, 꿈과 현실이 유추관계를 맺으며, 얻음과 상실이 부재하는 것처럼 숨어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욕망의 작용은 삶의 실질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생성적 에너지로 바뀐다. 그 결과 욕망의 힘은 억압과 실패, 획득과 타협의 아이러니한 화학적 결합을 통해 희망적 현실로 변모한다.

‘욕망의 힘으로 신세계’를 구축하려는 프로젝트이면서,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하는 무대를 구성하여 관객을 프로파일링하고 있는 창작집단 쓰리랑카타이거의 <알고리즘>(작가 이정수, 연출 최한솔, 24.02.01~04). 먼저 작품에의 진솔한 접근을 위해 <알고리즘>에 대한 선이해가 요청된다. 연출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 방법, 명령어들의 집합’이란 용어상의 정의를 뛰어넘어, 이 용어를 ‘복잡한 계산과 분석을 수행하고, 패턴과 트렌드를 파악하고 의사결정을 지원하여 우수한 결과를 낳는 ‘Algorithm’과 입력된 데이터의 질과 다양성에 따라 크게 편향된 결과가 가져올 수 있는 ‘Algorism’으로 구분하면서 “새로운 알고리즘적 정체성(new algorithmic identity)”이란 의미의 포획 망을 무대 위에 넓게 펼친다.

 

 

사진 제공: 연출가 최한솔

 

이 작품은 현 시대의 흔들리는 젊음을 대리하는 ‘빨모’를 주축으로 네 인물이 돈을 벌기 위해 사회적 유행인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닥치고 영상’을 찍기 시작한다. 촬영이 진행되면서 ‘휴대폰만 아이폰이면 뭐해, 사고방식은 피쳐폰인데’를 사유하는 상미(전아라 분), ‘빠름을 인정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임을 고집하는 진모(김광원 분), ‘주변 환경이 업데이트가 안 되어있음’을 탓하는 준호(홍덕기 분), ‘빠름(속도) 따위를 인정할 수 없음’을 몸으로 깨달은 무성(김소망 분) 네 인물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진다.

갈등의 양상은 나이 차이(형, 누나, 오빠)라는 서열화를 통해 권력자와 피 권력자로 나누어지다가, 항상 은폐상태로 있던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된다. 그것은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닥치고 따르면 돼, 그냥 닥치고 해, 그냥 하라면 할 것이지’라는 담화 속에 들어있다. 즉 선동적 폭력행위는 분열과 부조리한 ‘끼리끼리 의식’을 통해 ‘괜찮은 콘텐츠’를 만들어 경제적 이득을 취하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갈등은 ‘신세계 프로젝트’로 수렴된다. 결국 ‘세상을 엿 먹일 생각’으로 조직한 빨간 혁명 단은 ‘부조리를 거부하고, 자유억제를 거부하고, 세상의 모든 알레고리를 거부’함을 모토로 하면서 속박의 실존적 해방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애초부터 돈 빨아먹으려고’ 가면을 쓴 폭력적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암암리에 녹아있는 반(反) 알고리즘으로 구축되었기에 억압적인 ‘그대로 멈춰라’를 강요당한다. 결국 ‘트라이 앵글 초크’ 콘텐츠(가짜 죽음 연기 방송)를 끝으로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이런 병신 새끼나 병신 말에 휩쓸리는 새끼들아 ’채널 속에서 썩어라‘라는 달리 말하면 ’얼마 벌었냐 ?“ 로 막을 내린다.

<알고리즘>은 ‘무대 위의 연극’이라 할 수 있는 ‘오프라인 연극’과 ‘영상 송출에 특화된 연극’이라 칭할 수 있는 ‘온라인 연극’ 두 개의 레이어가 무대 위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그 속에서 네 명의 배우들은 젊음이란 정체성의 혼돈을 뒤흔드는 ‘살아남기 알고리즘(돈·취준)’, ‘폭력화된 서열화에서 벗어나기 알고리즘’, ‘선택과 결정의 편향된 알고리즘’, ‘언어폭력의 무상성을 체현하는 알고리즘’을 극화하기 위해 소리친다. 이 때 동시에 관객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가 이루어진다. 같은 공간에 함께 했던 퍼포머 관객은 그렇게 희구했던 반 알고리즘의 ‘빨간 신세계’가 어두운 현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상황을 철저하게 파고든 고발이었음을 성찰하게 된다.

 

사진 제공: 연출가 최한솔

 

 

특히 최한솔 연출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입력된 데이터가 편향되어 있다면, 알고리즘 자체도 편향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극적 장치를 통해 섬세하게 무대화 된다. 무대 삼면에 촘촘히 놓여 진 흰색 풍선들은 조명의 변화에 따라 다른 색의 풍선으로 바뀌는 모습으로, EDM으로 다양하게 변주된 동요 ‘그대로 멈춰라’는 순수성의 변색된 모습으로, 조명은 제 4의 벽을 깨면서 관객과의 새로운 관계를 비춰주는 빛으로, “으레 욕망해야지, 그럼! 네가 남들 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면서 다 따르잖아. 아니야? 이것도 마찬가지야. 너도 인간이잖아. 우리가 원하는 것에 따르면 돼.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사이) 닥치고 따르면 돼.”라는 간명한 메시지로 ‘보이지 않게 확립된 도식(圖式)의 힘’에 굴복하는 알레고리의 편향성을 예술적 미감(美感)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마무리 지으며 작가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알고리즘]의 세계관은 현실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관이 아닙니다. 작품 속 세계관은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이라 여길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세계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경제체제와 아시아의 유교사상, 아울러 다양한 갈등이 혼재하는 현실의 이념갈등, 가령 여전히 존재하는 매카시즘과 젠더갈등, 빈부격차가 그것입니다. 기성세대와 더불어 MZ세대로 분류되는 지금의 청춘들에게 이 모든 것은 현재 진행형인 갈등요소로 자리매김하였으며 더 다양한 갈등들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현재.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작품을 통해 던져 봅니다.”

공연 후 관습적으로 박수를 보내던 관객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누구에게 보내는 박수인가? 무대 위의 배우인가, ‘닥치고 영상 속 캐릭터인가? 나는 누구와 대화 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한 관습적인 연극의 형식에서 누구보다 충실한 관객의 역할을 하고 있는 나와 다른 관객들을 바라보며 영상 속 관객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소곤거리던 대화들과 욕설로 뒤 섞인 고함소리들이 파편이 되어 공간에 떠다니고 있다. 진솔한 이야기들과의 귀 맞춤 게임 그리고 함께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관객은 어느새 인간이 아닌 비인간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인가. 관객은 디지털 알고리즘시대에 누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지, 사람인지, 기계인지,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경험하고 무대를 빠져나온다.

 

공연이 끝난 후 극장을 나와 좀 더 매서워진 바람을 맞으며 신호대기를 하고 있는데 집으로 가는 614번 버스가 지나간다. 문득 늘 버스를 기다리던 정거장을 오늘은 지나쳐 걸어가 보자는 ‘낯선 나의 소리’가 들린다. 오늘,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나는 ‘도식(圖式)의 파괴자’가 된 걸까. 아니 반 알고리즘을 실천할 아나키스트가 된 걸까. 흐린 일상에 ‘뒤통수를 후려친 의미심장한 무대’였다. 봄을 건너다보며 만난 2024년 첫 관극의 발걸음이 가볍다 ‘젊은 연극’의 열정이 내 몸에 옮겨진 덕분 일게다. 연극인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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