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체공녀 강주룡>

글_황승경(연극평론가)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3년부터 매년 여성의 노동환경을 평가하는 유리천장 지수를 조사한다. 한국은 OECD 29개국 가운데 12년째 꼴찌를 도맡고 있다. 낮은 유리천장 지수는 우리나라 여성이 아직도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심각한 소득 불평등을 겪으며 소외당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세계 곳곳에선 양성차별 종식과 권리 증진을 요구하는 기념행사가 잇따랐고, 시위에 나선 여성들은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세계 여성의 날 상징색인 보랏빛을 물들였다. 우리나라에서는 95년 전, 평양 대동강변 을밀대에 올라 목청 높여 ‘여성해방, 노동해방’을 외쳤던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여공 강주룡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3월 8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이 무대에 올랐다. 제 23회 한겨례 문학상 수상작인 박서련 작가의 장편소설을 판소리로 각색한 <체공녀 강주룡>은 지난해 초연으로 호평을 받아, 1년여 만에 선보이는 재공연으로 비극적이고 드라마틱한 강주룡의 생애를 ‘1인 다역’ 창작 판소리로 그린다.

사진 제공: 바닥소리 ⓒ FOTOBEE 양동민

강주룡(1901~1932)은 평북 강계에 태어나 14살 때 서간도 길림성으로 이주했고 20살에 5살 어린 최전빈과 혼인한다. 고된 살림살이였지만 의좋은 남편이 있던 1년 남짓 이 시기는 강주룡의 생애에서 가장 따사로운 시기였다. 통의부에서 독립운동 하겠다는 남편을 따라나선 강주룡은 백광운(본명 채찬(蔡燦)이 이끄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1중대에 배속된다. 백광운(白狂雲, 본명 채찬(蔡燦))’과 그녀 사이의 불륜을 의심한 최전빈은 강주룡을 친정집으로 돌려보낸다. 그 사이 남편은 병으로 사망한다. 분노에 찬 시댁에서는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이라며 강주룡을 살인죄로 중국 경찰에 고발한다. 증거불충분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갈 곳이 없던 강주룡은 10년 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는다. 따가운 사회적 시선을 감내해야 했던 과부 강주룡은 조선 여성의 저임금 노동력을 요하던 평양의 고무공장에 취직한다. 고무신의 보급으로 당시 조선 내 고무공장이 급증했던 영향이 크다. 고무신이 지니는 상품적 특수성으로 일제의 규제가 적었고 소규모 자본으로도 운영 가능한 대표적 노동집약적 산업인 고무공장은 대부분 조선인 자본으로 운영되었다. 1929년 조선 내 공장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일본인 성년 남공 2원 32전, 여공이 1원 1전인데 비해 조선인 남공은 1원, 여공은 59전이었다(유태철, <일제하 국민생활수집 일제하의 민족생활사> 민중서관 1971).

일제강점기 조선 여공들은 강압적이고 가부장적인 작업분위기 속에서 하루 15시간 지속되는 노동시간 동안 기본적인 인권보장은커녕 위협적인 기만과 물리적 성적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었다. 그런 연유로 고무공업은 식민지 시기동안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노동운동이 일어난 현장이었다. 1930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제와 결탁한 평양 고무공장 자본가들은 17% 임금 삭감을 통보한다. 1930년 8월 평양시내 10개 고무공장 1800여명(평양 전체 고무직공이 2,300명)은 총파업을 단행한다. 결연한 의지로 비장하게 결의한 쟁의였지만 일본 경찰의 개입으로 200명의 직공이 해고되었으며 결사반대했던 임금인하는 단행된다. ‘소리극’이라 국악기 반주가 연상되지만 <체공녀 강주룡>의 음악에서 국악기 연주자는 타악을 치는 고수가 유일하다. 전체적인 사운드는 건반, 기타, 베이스, 바이올린이 판소리와 합을 이뤄 화려하며 애절하고 소탈하면서 자극적인 절묘한 음색을 만들어내 무대를 주도한다.

사진 제공: 바닥소리 ⓒ FOTOBEE 양동민

극에서는 이 시기 강주룡이 사회주의자 정달헌의 권유로 평양적색노동조합 결성준비위원회에 중추적으로 가담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명확치 않다. 당시 정달헌은 연희전문출신으로 러시아 공산대학을 마치고 당의 지령을 받아 1931년 1월 귀국했다. 그는 5개월간 평양에 머물며 직업별 노동조합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개편하며 적색노조를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고무공장직공파업을 조사하던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재판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평양의 고무공장파업과는 연관이 없다고 항변했다. 더구나 정달헌은 공산주의운동이 노동운동의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소련유학파였다. 결이 다른 정달헌이 극에서는 죽음을 불사하고 을밀대에서 투쟁하고 단식을 이어가는 강주룡의 기계를 높이 평가해 그녀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극중 역할을 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1931년 강주룡이 근무하는 평원고무공장을 비롯한 몇몇 공장에서는 다시 임금삭감을 기도한다. 이에 강주룡을 비롯한 여공 47명은 앞장서 단식을 하며 투쟁을 이어나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절벽 앞에 선 기분으로 강주룡은 광목천을 찢어 만든 줄을 타고 을미대 2층 누각에 오른다. 장장 9시간동안 무산자들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안정을 목청껏 외쳤고 언론에서는 그녀를 ‘체공녀(滯空女·공중에 떠 있는 여자) 강주룡’으로 앞 다투어 취재했다. 당시 어떤 이는 유교적 규범으로 과부 암탉이 지붕위에 올랐다며 색다른 시선으로 혀를 차기도 했겠지만 강주룡은 어느 장정도 하지 못했던 고공농성을 서슬 퍼런 일제 강점기에 감행했던 여장부다. 그녀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덕분에 사측은 임금 인하를 철회했고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 중 강주룡을 제외한 절반이 복직될 수 있었다. 설상가상 그녀는 증거도 없이 정달헌의 소개로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예심 도중 병보석으로 출소한 그녀는 2달 뒤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한다.

사진 제공: 바닥소리 ⓒ FOTOBEE 양동민

<체공녀 강주룡>은 8명의 배우들이 100여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서간도와 평양을 넘나들며 관객에게 최고의 앙상블을 선사한다. 원인과 결과로 설명되는 논리적 서술이 바탕이 된 사변적인 소설의 흐름이 아니라 이질적인 무대언어들이 결합·병치되는 독창적인 전개로 무대의 무의식적 심층세계 즉 상상의 세계로 관객을 인도하며 과거를 성찰하고 오늘을 사색하게 한다. 강주룡은 당시 식민지 사회가 상대적으로 인정하던 엘리트여성도 아니고 신여성도 아니다. 그러나 한 입으로 두 말 안하고,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네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가슴 뻥 뚫리는 우리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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