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4)

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정상에 오르기 직전 야무지게 지난 산행을 정리하는 부록 4다. 

 이번 연재에는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지나쳤던 가곡들 중 휴고 볼프(Hugo Wolf)가 1878년에 작곡한 슬픔의 성모 앞에 그레트헨을 집중적으로 분석해 보자.  

 

Hugo Wolf (1860~1903)

 

오스트리아 출생의 볼프는 서양 예술가곡사(史)에서 슈베르트의 계승자로 칭송되는 매우 중요한 가곡 작곡가다. 동갑내기 친구인 구스타프 말러와 함께 바그너와 브루크너에 열광했던 볼프는 빈 음악원을 뛰쳐나와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그의 여생은 신경 매독과 양극성 장애(조울증) 그리고 숱한 자살 시도로 완전히 황폐화 되었다. 1903년, 결국 볼프는 정신병원에 갇힌 채 사망했지만, 심오한 미학을 품은 500여 곡의 예술가곡은 불멸의 음악으로 남았다. 

 예민함과 심오함. 볼프의 예술가곡을 대표하는 두 단어다. 이런 묵직함 때문에 일반 청자가 볼프의 음악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의 정교한 미학 원리를 한 번만 이해하면, 가늠하기 힘든 깊이로 단번에 빠져들게 된다.  

 볼프는 문학적 소양도 대단했다. 독서광이었으며, 정기적으로 비평문을 기고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문학과 음악의 조합을 연극에 이식한 괴테의 작품에 천착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889년에 완성한 괴테 가곡집은 무려 51곡으로 구성된 거대한 작품집이다. 하지만 대부분 빌헬름 마이스터’, ‘서동 시집’ 그리고 다른 발라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아쉽게도 파우스트의 텍스트는 없다. 하지만 그의 사후 33년이 지나 파우스트 비극 1부의 명장면 성벽 안 좁은 길(Zwinger)’을 가사로 쓴 Gretchen vor dem Andachtsbild der Mater Dolorosa (슬픔의 성모상 앞의 그레트헨)의 악보가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볼프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통해 그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연극과 문학을 음악으로 융화하려 했는지 엿 볼 수 있다. 

 

 시와 음악의 친밀한 결합은 알고 보면 끔찍한 일입니다. 사실 끔찍한 역할은 음악이  합니다. 둘의 조합에서 음악은 흡혈귀나 다름없습니다. 식욕이 왕성한 젖먹이를 생각하면 됩니다. 계속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보채며 포동포동하게 살이 찌는 동안 엄마의 아름다움은 시들어가죠. 물론 이런 비유는 음악이 시와 결합하여 청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논할 때만입니다. 하나의 예술 장르를 다른 장르보다 선호하기에 발생하는 이 부조리가 제게는 정말 큰 충격입니다. 

 

 오선지 위의 음악이 문학의 원고지를 훼손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 예민하고 심오한 작곡가 볼프는 극작가 괴테의 연출에 어떤 음악적 연출을 더 했을까?  

 

츠빙거(Zwinger; 성벽의 벽감, 성벽의 안쪽 부분)에서 슬픔의 성모상에 기도하는 그레트헨. (츠빙거는 좁고 외지고 어두운 공간이다. 꺾인 꽃을 꽂은 화병과 슬픔의 성모상 가슴에 박힌 칼이 인상적이다.)

 

 우선 괴테의 파우스트 비극 1부 제18장의 원문은 총 8연의 시(詩)이자 노래다. 크게 세 부분으로 각 3행으로 구성된 1, 2, 3연과 각 6행으로 구성된 4, 5연 그리고 각 4행으로 구성된 6, 7, 8연으로 나눌 수 있다. 

 (이하 텍스트는 도서출판 길에서 2019년에 펴낸 파우스트 1’ (옮긴이 전영애)를 인용했고, 원문의 각운 부분은 하이라이트로 표시해 놓았다.

 

 

 괴테는 지시문에 무대를 설정해 놓았다. 어둡고, 외지고, 좁은 공간 츠빙거. 그리고 꺾은 꽃을 담는 화병 그리고 슬픔의 성모상이다. 그레트헨은 성모 마리아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동일시한다. 그리고 아들(예수)의 죽음을 겪은 성모는 후에 그레트헨이 영아 살해를 저지르는 중요한 암시며, 기도 대신 한숨을 올리는 것 또한 정교한 문학적 장치다. 1, 2, 3연 마지막 행의 각운은 Not(괴로움), Tod(죽음) 다시 Not(괴로움)으로 성모의 가슴에 박힌 칼처럼 쩔러 후벼 파는 듯한 발음이다.  

 

 볼프의 가곡은 4/4박자 바단조(minor)로 조용히 시작한다. 볼프는 희곡의 지시문처럼 악보 상단에 Sehr Langsam und mit der innigsten Empfindung(매우 느리게 그리고 깊은 내적 감정으로)라고 표기해 놓았다. 피아노의 전주는 잔뜩 붙어 있는 플랫(b)처럼 하강하는 불협화음이다. 매우 무기력하고 답답한 느낌으로 곡을 시작하는데, 이는 볼프가 괴테의 지시문처럼 음악에 공간 즉, 무대를 마련하는 청각적 연출이다. 이 피아노 전주 2마디 동기로 볼프는 그레트헨이 첫 대사를 하기 전에 이미 청자를 츠빙거라는 공간으로 데리고 온다. 

 또, 볼프는 괴테가 강조한 각운에 음악적 힘을 더한다. 1행을 마치고는 한 박자, 2행이 끝나고는 두 박자 반을 쉬며, 3행의 마지막에는 세 박자 반을 쉬고 4연으로 들어가게 된다. 작곡가는 점점 길어지고 깊어지는 그레트헨의 한숨을 침묵 즉, 휴지(休止)의 연장으로 표현한다. 

 

 

 6행으로 구성된 4연과 5연에서 그레트헨의 고통을 최고치로 끌어 올린다. 각운은 1, 2행과 4, 5행 그리고 3행과 6행이 맞는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각운은 떨어져 있는 3행과 6행이다. 4연에서는 Gebein(뼈, 골수)과 allein(오직, 홀로)에 맞춰져 있는데, 깊어서 외롭고 외로워서 깊은 그레트헨의 내적 감정을 파고든다. 5연에서는 3행과 6행의 각운이 hier(여기)와 mir(나의)인데, 앞의 한 단어씩 덧붙이면 여기 가슴과 내 안이다. 4연과 마찬가지로 화살표의 끝이 그레트헨의 안을 향하지만, 5연에서 그레트헨은 2행과 5행에서 wie wehe(얼마나 고통스러운지), ich weine(나는 울어요)를 세 번씩 반복한다. 이는 고통의 반작용인 비명이자 외적 호소다. 여기서 화살표의 끝은 그레트헨 밖으로 방사된다.  

 

 볼프는 괴테의 연출 의도를 완벽하게 꿰뚫는다. 우선 음악의 3연의 끝과 4연을 연결하는 부분에서 목소리 없이 피아노가 sehr ausdrucksvoll (molto espressivo, 더욱 풍부한 감정으로)로 가수의 감정을 유도한다. 곧바로 박자가 6/8으로 바뀌면서 etwas erregter (좀 더 격앙되어)라는 지시문이 4연에 나온다. 피아노와 가수는 그레트헨의 고통스러운 내적 몸부림을 표현하며 3행 Gebein(뼈, 골수)에서 최고음(솔b)에 도달한다. 탈진했는지 성악은 10마디의 긴 휴지를 갖고, 그 사이 피아노의 오른손 고음부는 떨어지는 눈물을 표현하고 왼손 저음부로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하강 화음으로 구슬프게 연주한다. 

 다시 바단조로 돌아온 5연의 시작에 볼프가 표시해 놓은 지시어는 etwas bewegter(더 움직임을 가지고)이다. 볼프는 바로 이어지는 6, 7, 8연의 광기의 전조를 부드러운 율동으로 미리 풀어낸다. 그리고 5연 2행에서 세 번 반복되는 wie wehe(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마지막 세 번째에서 가장 고음을 찍고, 5행의 ich weine(나는 울어요)는 마지막 외침에 wie wehe보다 단3도 높은음으로 울부짖는다. 매우 드라마틱한 음악적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이후 피아노가 연이어 떨어지는 눈물을 구슬프게 연주하고 분위기가 급속하게 가라앉는다.  

 

 

 그레트헨은 6연과 7연에서 고통에 미쳐간다. 성모상에 바치려고 꺾은 꽃은 그레트헨의 눈물로 자란 꽃인데, 이것을 꺾었다는 행위는 곧 고통 이후의 죽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고통과 죽음의 추상적 개념은 꺾인 꽃과 가슴에 칼이 꽂힌 슬픔의 성모상으로 물화 된다. 앞으로 전개될 그레트헨의 운명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괴테가 무대와 소품으로 심어 놓은 강렬한 복선이다. 이어 그레트헨은 분열된다. 7연의 1, 2행은 햇살로 밝은 방(kammer)으로 희망과 긍정의 외부를 노래하고 3, 4행의 나는 ‘온갖 비탄(Jammer)’으로 쌓인 절망과 부정의 내부다. 괴테는 한 연 안에 대조되는 두 개의 심상을 병치해 정신 분열적인 그레트헨을 묘사한다. 마지막 8연의 1행은 구원을 바라는 그레트헨의 발작이다. 1행의 마지막 단어는 Tod(죽음)인데, 이어지는 2, 3, 4행이 1연과 수미쌍관으로 동일하므로 4행의 Not(괴로움)와 각운을 이루며 시가 끝난다. 그레트헨의 노래는 고통과 죽음이다. 

 

 볼프는 괴테가 심어놓은 미세한 연출을 빠짐없이 악보로 옮겼다. 6연의 꽃은 피아노의 눈물 위에서 노래하다 꺾인다. 7연의 1, 2행과 3, 4행의 대비는 두 핵심 시어인 kammer(방)의 Jammer(비탄) 음정 낙차로 표현한다. 

 

악보의 59마디 (괴테 원작의 7연 1행)과 악보의 63마디 (괴테 원작의 7연 3행)

 

 내용의 결말이자 시의 마지막 연인 제8연의 1행의 발작적인 외침은 음악적 클라이맥스다. 볼프는 강렬한 효과를 내기 위해 가수의 음정을 높여 이 행을 한 번 더 반복한다. 그레트헨의 목소리가 끊어지면 곧바로 피아노가 immer leidenschaftlicher!(점점 더 열정적으로!)라는 지시어를 따라 소용돌이치는 광란을 분출한다. 하지만 세 마디뿐이다. 두 연주자는 곧바로 lange pause(긴 휴지)라는 지시어를 맞닥뜨리게 된다. 볼프가 이렇게 세세하고 잦은 연주 지시문을 넣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5연 1행에서 시작해 6, 7연을 거치며 고조된 그레트헨의 광기가 8연 1행에서 절정을 맞고 이제 끝났음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이고, 다른 하나는 광란의 몸부림이 끝나고 다시 고통의 현실로 돌아온 그레트헨이 첫 연을 읊조리기 위한 고도의 장치다. 볼프는 괴테의 극작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휴지가 끝나면 wie zu Anfang(처음과 같이)라는 지시어와 함께 pp (피아니시모; 매우 여리게)로 2, 3, 4행을 노래한다. 1연의 반복인 노래는 마지막 각운 Not(괴로움)를 부르며 끝나고 홀로 남은 피아노는 디미뉴엔도(diminuendo; 점점 작게)를 거쳐 ppp (피아니시시모; 가장 여리게)로 약해지면서 맥박이 멎듯이 막을 내린다. 

 

젊은 시절의 휴고 볼프 사진을 표지로 한 가곡 전집

 

 볼프는 극작가의 문학적, 연극적 의도를 심연까지 파악했다. 그래서 그의 오선지 위 조성과 음표는 배우의 대사와 배경 지시문이고, 빼곡한 악상 기호와 세세한 연주 지시는 연출 노트나 다름없다. 배우의 호흡을 가수의 쉼표로플롯의 진행은 템포로, 감정의 흐름은 음정과 조성으로 치환한 볼프는 주도면밀하고 위대한 음악적 연출가였다. 

 볼프의 가곡에서 피아노 연주자는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연출가다. 배우 즉, 가수가 완전히 대사와 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연출가인 피아노 연주자는 나머지 모든 것을 그려내야 한다. 그것이 볼프가 목표한 두 장르의 이상적 융합이다. 20세기 말, 아직 정신이 온전한 볼프는 자신이 작곡한 가곡에서 직접 피아노 연주를 맡았다. 연극의 리허설처럼 그는 가수에게 매우 세세한 지시를 하면서 장면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무대 위로 올라간 기민한 연출가’ 이것이 볼프 예술가곡의 심오한 극적 미학이다. 

 

휴고 볼프와 요한 폴프강 폰 괴테

 

 그런데 그레트헨이 슬픔의 성모에게 올린 간청은 이루어졌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레트헨은 구원되었다. 하지만 대가로 죽음을 바쳐야만 했다. 

 

 

 괴테의 비극 1부 제18장과 볼프의 가곡 슬픔의 성모상 앞의 그레트헨에서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저 음시(音詩)는 파우스트 비극 2부의 최종 장인 심산유곡(Bergschluchten)’에서 아래와 같이 변용된다.

 

 

 Tod(죽음) 이후, Not(괴로움)의 각운은 Glück(행복)이 된다. 

 볼프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도 노래로 연출했으리라. 하지만 마흔셋이라는 젊은 나이에 Glück(행복)의 각운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그의 동갑내기 친구 구스타프 말러(1860~1911)가 장대한 규모로 아름다운 마지막 각운을 완성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파우스트 부록 연재가 다 마무리된 후 파우스트 최종편에서 소개하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IBXj5KjvG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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